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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ug 30. 2024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잊고 있었던 삶의 소중함이 다시 떠오른 날.

초등학교 4학년. 열한 살이 되었을 무렵에 만났던 담임 선생님께서는 해가 눈부시게 쏟아지던 날 아침에 단 한 마디로 수업을 여셨다.



"얘들아, 너흰 자기 전이나 학교에 올 때 무슨 생각을 하니?"



침묵이 숨을 쉬는 교실을 바라보던 선생님께서는 속삭이듯이, 그러나 조금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선생님은 죽지 않고 살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오늘도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생각했어. 내가 죽지 않고 이 학교에 와서 참 다행이라고."



 죽지 않고 살았다.

이 짧은 문장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이 문장을 귀에 담은 그 순간부터 삶이 당연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깨달았고, '우리는 사실 운명의 틀 안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수많은 변수들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뒤엉킨 채로 살아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루의 쳇바퀴를 돌린다. 오늘 당연하게 했던 일이 내일은 당연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당연하게 살아있던 누군가는 내일 그렇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고, 그저 지금 가는 길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 사람들은 모두 안갯속을 걷고 있다.



 그런 생각을 그려나가다 보면,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건 어찌 보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일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곁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볼 수는 있다. 나와 같거나 조금은 다를지도 모를 누군가. 하나의 커다란 안갯속에 머리를 맡긴 채로 우리는 수많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가며 살아간다. 의식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충실히 오늘을 살아내고 잠들기를 반복한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지만, 잠은 결국 죽음의 체험이 아닐까 싶다. 하늘이 살아있는 생명에게 주는 여러 번의 기회가 결국 삶이 아닐까. 어떻게든 원하는 모양으로 꾸미고 만들어보라고 개인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덕적인 기준과 윤리적인 선 안에서 마음껏 자신의 삶을 살아 보라고 주는 것이 '하루'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삶의 유한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와 타인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지 않고 살아내서 참 다행이다.

아직 사랑할 기회가 조금은 더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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