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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한 Feb 28. 2024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하여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꽤 고전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원한다. '자유로움‘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미국의 정치인 패트릭 헨리가 말했듯, 자유가 결여된 삶은 죽음보다도 가치가 없을 정도로 우리 인류에게 자유는 가장 중요한 그 어떤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기 전에, 우리 각자의 '자유'를 재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라는 추상적인 가치는 사람마다 그 범주가 제각각이다. 요즘 미디어에 귀가 아프도록 쏟아지는 '경제적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면 정신적 자유?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을 두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 고전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삶'을 조르바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결국 책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삶은 '그 무엇을 잃어도 두렵지 않을 자세'로 그저 살아가는 삶인 것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다. 하지만, 살아가며 최대한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하고,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것이 내 손을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은 결코 없다. 모든 것은 내 삶의 찰나에 잠시 스쳐가는 것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살아가며 그 어떠한 것도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은 우리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글쓰기에 한평생을 바친 지식인이다. 소위 말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샌님이다. 반면, 조르바글자라고는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교육받지 못한 계층에 속하는 이빨이 다 빠진 할아버지이며 육체노동자이다. 그는 탄광에서 광석을 캐기도 하였고, 생존하기 위해 온갖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며 살아왔다. 방탕하고, 욕구에 충실하며,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 자체이지만 작가는 그와 대화하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참고로 이 책에서 나오는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며, 스토리도 실화에 기반한다. 이 책은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책상에서 펜대를 굴리며 얻은 이론적인 지식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경험한 지혜와 깨달음들이 더 실용적이며 더 가치 있을 때가 많다. 삶은 글로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할' 그 무언가이다. 그 누구도 다음 날을 예측할 수도, 제대로 대비할 수도 없다.


책에서 주인공(니코스 카잔차스키)은 펜대만 굴리며 실제 인생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진짜' 인생을 배워보자며 실제 사람들(생존 전선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경험해 보기 위해 자신의 친척이 물려준 탄광이 있는 섬으로 떠난다. 그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더럽고 냄새가 나지만 그 눈빛에서 삶의 흔적들과 알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조르바'를 만나게 되고, 결국 그와 함께 탄광 사업을 하기로 하며 둘 사이는 그 누구보다 가까워지게 된다.


영화 '언터쳐블'에서 흑인 노동자와 백인 거부가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쌓는 것처럼 작가와 조르바도 계층을 뛰어넘는 소통과 우정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작가는 조르바를 스승처럼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카잔차키는 그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에서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를 언급했다. 이렇듯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인생에 있어 말 그대로 '스승'인 셈이다.


조르바를 향한 카잔차키스의 애정은
그의 묘비명에도 잘 드러나 있다.
Den elpizo tipota(I hope for nothing).
Den forumai tipota(I fear nothing).
Eimai eleftheros(I am free).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롭게 살았던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했던 것이다.



1. 책 제목 : 그리스인 조르바




2. 저자 소개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의 작가, 시인이자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이다.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며 아테네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작가생활 중 총 9번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한 표 차이로 그 유명한 알베르 까뮈라는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내줬다.  알베르 까뮈는 나중에 말하길,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수백 배는 더 이 영예에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많은 곳을 여행하였는데 키프로스, 이집트,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심지어는 중국이나 일본도 다녀간 적이 있다.  1957년, 그는 백혈병을 앓는 와중에도 중국과 일본에 다녀왔으나, 돌아오는 길에 독일에서 병이 악화되어 쉬는 중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진정한 의미의'자유로운 삶'을 갈망하였다.



3. 담고 싶은 구절과 생각들(출처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매월당, 2015.)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진흙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무디고 둔하다. 영혼의 지각 능력은 조잡하고 불확실하기에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이별은 얼마나 다를 수 있었을까.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치솟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 인생이 그 한 마디로 집약되어 버린 것에 대해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 그토록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조르바는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숨 쉬는 심장과 풍부한 말들을 쏟아내는 커다란 입과 위대하고도 야성적인 영혼을 지닌, 모태의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무슨 뜻이긴. 임금이니 민주주의니, 국민투표니, 국회의원이 어쩌고 해 봤자 다 그게 그거라는 소리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조르바에게는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들마저도 시대에 뒤떨어진 허무맹랑한 수작으로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전신기술, 증기선, 엔진, 도덕이나 종교 같은 것도 녹슨 고물 총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의 정신은 세상을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의 나는 피가 끓는 청춘이었어요. ‘왜’라는 이유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사물을 똑바로 보고 판단하려면 나이가 좀 들어야 해요. 이빨도 좀 빠져야 되고. 이빨 하나 없는 늙은이라면 ‘얘들아, 물면 안 돼. 그럼 못써.’ 하고 소리나 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빨 서른두 개가 멀쩡할 때는... , 사람이 젊었을 때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어요.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나 마찬가지라고요.


“뭐라고 하겠어요? 가만 보니 보스는 배를 곯아본 적도, 누굴 죽여 본 적도, 도둑질을 해보거나 간음한 적도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야 어떻게 이 세상의 이치를 알겠소? 당신 머리는 순진하고 살 같은 햇볕에 타본 적도 없어요.” 그는 그렇게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내 섬세한 손과 창백한 얼굴, 진창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보지 못한 내 인생이 부끄러워졌다.


좀 더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혀 기존의 정열을 버리는 것. 그것 역시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민족, 혹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우리가 고상한 것을 따를수록 노예 사슬은 길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놀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럼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배가 고프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육체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엾게 여겨야 해요. 육체에 무얼 좀 먹입시다. 육체는 짐을 지고 있는 짐승이나 마찬가지예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 영혼을 내던지고 말 겁니다.”


“우선 배를 채운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든 다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는 필래프가 있어요. 그러니 필래프만 생각하자고요. 내일이 되면 갈탄 광산이 우리 앞에 있을 테니 그땐 갈탄 광산만 생각하고요. 우물쭈물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게 돼요.”


세상 모든 일에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 동물, 나무, 별은 모두 상형문자이며 그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는 사람은 고독한 존재이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이며 동물, 나무며 별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후에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이 오면 때는 이미 늦은 법..


“내게 할머니 한 분이 계셨지요. 그때 아마 여든 살이 넘으셨을 겁니다. 할머니 연세가 그때 여든 살쯤 됐었고, 우리 집 맞은편에는 꽃처럼 싱싱한 계집애가 하나 살았지요. 토요일 저녁마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괜히 들 날뛰고들 했지요. 우리는 모두 귀 뒤에다 향기로운 바질을 꽂았고, 사촌 하나가 기타를 치면 우리는 세레나데를 부르곤 했지요. 그 대단한 사랑! 그 엄청난 정열! 우리는 황소처럼 울부짖었어요.

우리는 모두 그녀에게 미쳐 있었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이 되면 그녀에게 몰려가 우리 중 한 명을 고르라 했지요. 보스, 믿을 수 있겠어요? 여자들에겐 낫지 않는 상처가 하나 있다는 거 말이에요. 다른 상처들은 다 나아도 그것만은 절대 안 낫지요. 여자가 여든 살이 돼도 그 상처는 벌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 할머니는 토요일마다 침대를 창가에다 붙이고는 조그만 거울을 꺼내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빗고 가르마까지 타는 거지요. 그러고 나서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주변을 살피곤 하지요.

~중략~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한테 혼이 났어요. 할머니는 나에게 계집애 뒤꽁무니만 쫓아다닌다고 야단을 치셨지요. 나는 그 잔소리가 너무 지겨워서 솔직히 말했죠. ‘할머니는 왜 토요일이 되면 호두나무 잎사귀를 입술에 칠해? 왜 가르마를 타? 우리가 할머니한테 세레나데를 불러줬으면 좋겠지? 우리가 쫓아다니는 건 크리스털로라고요. 할머니는 냄새나는 송장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스, 믿지 못할 겁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라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깨달았어요. 할머니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강아지처럼 잔뜩 웅크리고는 턱을 덜덜 떨더군요. 젊은것들은 정말 잔인한 동물이지요. 사람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할머니는 깡마른 팔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내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너를 저주한다!’ 이렇게 울부짖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부터 할머니는 쇠약해져 갔어요. 두 달이 지나자 더 이상은 가망이 없어 보였어요.

할머니는 숨이 넘어갈 무렵 나를 보며 자라처럼 식식거렸어요. ‘날 죽인 건 바로 너다. 알렉시스! 저주를 받아라. 내가 받은 고통을 다 네게 돌려주마!’라고 말했지요. 할머니의 저주가 들어맞고 있는 거예요. 내 나이 예순다섯이에요. 허나 백 살을 살아도 그 저주에서 못 벗어날 거예요. 백 살이 돼도 뒷주머니에는 거울을 챙기고 암컷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겠지요.”


우리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조차도 조르바에게는 무시무시한 수수께끼가 된다. 그는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도 말을 멈추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듯 이야기한다. “저 신비함은 무엇일까요? 여자란 과연 무엇일까요? 왜 날 이렇게 궁금하게 만드는 거지요? 말해봐요, 난 여자의 정체에 대해 묻고 있어요.” 그는 계속 물었다. 그는 남자나 꽃이 핀 나무, 물 한잔을 보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그는 늘 만물을 처음 보듯 대하고 있었다.


“보스, 이 빨간 물의 정체는 뭡니까? 말해 봐요. 늙은 가지에서 새싹이 돋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 열매가 달려도 처음엔 씁쓸한 맛이 나죠. 그런데 시간이 흘러 햇볕에 열매가 익으면 이렇게 꿀맛 나는 달콤한 게 만들어져요. 이게 바로 포도라는 겁니다. 이 포도를 으깨서 술꾼 성 요한의 날에 열어보면, 그게 포도주가 되어 있답니다. 이건 기적이라고요! 이 빨간 물을 마시면 몸을 이길 수 없을 만큼 간덩이가 커지고 하느님께 시비를 걸게 되지요. 보스, 말해 봐요.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은 태초의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물, 여자, 별, 빵이 신비로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보스, 인간은 짐승이에요. 짐승 중에서도 아주 엄청난 짐승이지요. 하지만 보스는 모르고 있어요. 당신에겐 인간이라는 것과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짐승이라고 말해 줄 테니. 짐승에게 거칠게 대하면 그 짐승은 당신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친절하게 대한다면 그 짐승은 눈알도 뽑아갈 거요. 그러니 보스, 거리를 둬요. 그들에게 배짱을 심어주진 마요. 우리는 평등하고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소리도 집어치우고요. 그러면 그들은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의 권리와 빵마저 훔쳐갈 것이고, 결국 당신을 굶어 죽게 만들 거예요. 보스, 모든 걸 다 걸고 하는 충고니 제발 거리를 둬요.”


“나는 그 어떤 것도 안 믿어요. 오직 나, 조르바만 믿을 뿐. 내가 다른 것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에요. 털끝만큼도 나을 게 없지.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짐승이니까.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래도 아직까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것들은 다 허깨비일 뿐이에요. 나는 오로지 이 눈으로만 보고, 이 귀로만 듣고, 이 내장으로 삭이는 것만 믿어요.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지는 거고 조르바가 죽으면 세상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너무 이기적이군요” 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보스. 그게 사실이니까. 나는 콩을 먹으면 콩에 대해 말해요. 내가 조르바니까 조르바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은 내게 채찍이 되어 돌아왔다. 너무도 강인했기에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일하며 살아가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만일 내가 그런 사람들과 살아가야 한다면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그들을 가짜 깃털로 만들어놓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속에 이 해변에서 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생겨났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고민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만들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쳐 확실한 교류를 할 것. “너무 늦은 건 아닐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니 보스, 사람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둬요. 사람들 눈뜨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고요. 좋아요, 눈뜨게 해 줬다고 칩시다. 그다음엔 뭐가 보이겠어요? 비참한 일이에요. 보스,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내버려 둬요. 그냥 꿈꾸게 내버려두잔 말입니다.”


나는 황급히 글을 썼다. 바빴다. 붓다는 나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내 뇌 속에서 상징으로 가득 찬 푸른 리본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리본은 매우 빠른 속도로 풀려나왔고 나는 그것을 따라잡으려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간단했다. 나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적고 있었다. 연민과 거부, 대기로 이루어진 전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중략~ 손가락이 아파 왔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환상은 빠르게 지나가며 사라졌다. 나는 그 환상을 따라잡아야만 했다.


“끝나지 않을 전쟁 같은 건 염병할 여자뿐만이 아닙니다. 먹는 짓도 끝없는 전쟁이지요.”


너무 많이 먹어 몸에 김이 무럭무럭 나던 그는 ‘신부는 없소.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오.’라고 하더군요.


“하느님이 우리 남자들에게 분별력을 더 주시든지 아니면 X알을 까버리든지 해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 남자들은 끝나버리고 말 테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라고 했던가. 옳은 말씀이지.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 자신의 키에 맞는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지. 내 사랑하는 제자여, 스승이여. 요즘의 내 행복도 그러하다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지. 알다시피 사람의 키 높이가 항상 같진 않으니 말이야.


“미미코, 넌 어떻게 지내니?” “어때 보여요? 나는 귀족처럼 살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빵부스러기를 먹고, 그다음엔 남의 일을 해주고 있죠.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든 다 해요.”


 “죽어야 말썽이 없는 거지요. 산다는 건 말이에요, 보스, 사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사는 거예요!”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과의 교류는 어느새 나만의 헛된 독백이 되어버렸다. 나는 타락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했다.


문득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가 떠올랐다. 나비는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서 허리를 굽히고 입김으로 열심히 데워주었다. 그래서였는지 내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며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날개가 뒤로 접히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그때의 공포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날개를 펴기 위해 애썼고, 나는 입김을 불며 나비를 도우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기 위해 날개를 펴는 일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 입김이 때가 되지도 않은 나비를 집에서 나오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몸을 떨며 몇 초 뒤에 내 손바닥 위에서 죽었다. 가녀린 나비의 시체만큼 내 양심에 무거운 가책을 주는 건 없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았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하지도 말고, 자연의 리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새해의 아침을 생각했다. 그 가엾은 나비가 내 앞에 나타나 날개를 파닥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진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알렉시스, 너한테 해줄 얘기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여자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드시려는 그 순간 –그 순간에 저주가 있기를! - 악마가 뱀으로 둔갑해서 갈비뼈를 훔쳐 달아나지 않았느냐? 하느님이 쫓아가 뱀을 붙잡았지만 이 악마 녀석은 하느님 손가락 사이로 쑥 빠져나갔지. 결국 남은 건 악마의 뿔뿐이었단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살림 잘하는 여자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니 내 악마의 뿔로 여자를 만들어보겠노라 하시고는 만드셨지.


얘, 알렉시스, 그래서 여자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거다. 여자의 어디를 만지든 그건 악마의 뿔을 만지는 거야. 그러니 여자를 조심해라. 여자든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훔쳐서 보디스에 넣고 다녔지. 여자 가슴이 불룩한 건 다 그래서란다. 그런데 요즘은 그 염병할 것들이 보란 듯이 흔들고 다니더구나. 사과를 먹으면 끝장나는 것이다. 그러니 먹지 마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이게 우리 할아버지가 나한테 알려준 교훈이지요. 그러니 내가 얌전히 자랄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했어요. 악마한테 곧장 달려간 거지요.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조르바는 그걸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보스, 봤어요? 경사면에서 돌멩이가 다시 생명을 얻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고 기뻤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았던가. 모든 일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에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본다. 아니, 창조하는 것이다.


이곳으로 오면서 나는 내 운명도 함께 데려왔네. 운명이 나를 데려온 게 아니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만 행동하니까. 나는 이곳에 내 운명을 데려와 열심히 일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기한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보곤 하지요.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으니까요. 대다수가 브레이크를 쓰지요. 하지만, 보스, 이건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입니다만, 나는 브레이크를 벌써 오래전에 버렸어요. 나는 콰당탕 부딪치는 게 두렵지 않으니까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콰당탕이라고 합니다. 내가 콰당탕하는 걸 두려워한다면 오산이에요. 나는 항상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사니까요. 부딪쳐 박살이 나면 좀 어때요. 그래봤자 무슨 손해 날 게 있겠어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겠어요? 물론 갑니다. 하지만 이왕 갈 거면 신나게 가자는 얘깁니다.”


“영원을 생각해 보세요. 십 년, 십오 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녀원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매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뭘 먹고 싶거나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목구멍이 미어터지게 처넣고 다시는 그 생각이 안 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이제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거든요.”


그때 나는 양의 목을 따듯이 그 신부의 목을 따버렸어요. 귀도 잘라서 주머니에 넣었고요. 아시겠지만, 그 당시 나는 불가리에 놈들의 귀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신부 놈의 귀를 잘라 도망갔습니다. ~중략~ 며칠 뒤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그 마을로 다시 들어갔는데, 집 앞에서 노는 다섯 아이들을 만났어요.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신의 뜻이었겠지요. 나는 애들한테 다가가서 어느 집 애들이냐고 물었어요. 불가리아 말로요. 그러자 가장 큰 사내아이가 고개를 들었지요, ‘신부 댁 애들이에요. 아버지는 며칠 전 마구간에서 목이 잘렸어요’ 이러더군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지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어요. 내가 벽에 기대어 앉자 그때서야 멈추었지요. ‘이리 와라, 얘들아, 가가이 오렴.’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지갑을 꺼냈지요. 터키 파운드랑 그리스 돈이 잔뜩 들어 있었어요.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돈을 몽땅 바닥에 쏟았어요. ‘자 마음껏 가져가렴.’ 내가 그렇게 외치자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땅에 엎드려 허겁지겁 돈을 집었지요. 그렇게 전부 다 주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자 나는 셔츠를 풀고 내가 애써 엮은 소피아 성당 장식을 떼어 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도망쳤습니다. 지금도 도망치고 있는 중이지요.


요즘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다.’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요.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없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요. 내가 마지막으로 먹게 될 빵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나이를 더 먹으면 아마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다 불쌍하다니까요. 다들 마찬가지예요. 나는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오, 여기 또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요. 누군지는 몰라도 이 사람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할 테지. 이 사람 안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죽게 되어 땅 밑에 뻗을 테고 구더기 밥이 될 테지.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나 마찬가지예요.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되니까요.


“내 조국이라고 했습니까? 보스는 책에 있는 그 엉터리 같은 얘기를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건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이라고요. 앞뒤 분간할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모든 걸 끝냈지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조르바가 부러웠다.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 했던 것들을 그는 몸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고독에 잠겨 의자에 앉아 풀려고 하던 문제를 그는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산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풀어버린 것이다. 비참한 기분이 들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일을 대충 하게 되면 끝나는 거예요. 말도 대충 하고 선행도 대충 하다 보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 아니겠어요? 할 때는 화끈하게 해야 돼요. 못을 하나 박아도 제대로 박아야 이기는 겁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만 악마인 것들을 더 미워하시지요’


“우리가 비둘기 한 쌍처럼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뭐 합니까. 가서 춤이나 춥시다. 먹어 치운 양한테 미안하지도 않소? 그냥 방귀로 빠져나가게 할 거예요? 가자고요, 가요. 가서 방귀가 아닌 노래나 춤이 되게 하자고요. 조르바는 다시 태어났도다!”


“욕하고 싶거든 들어보고나 하세요. 세상을 다 돌아본 건 아니지만 나는 뱃사람 신드바드예요. 나는 도둑질도 해봤고 사람도 죽여 봤고 거짓말도 많이 했지요. 그리고 수많은 계집들을 데리고 놀아봤고 온갖 계명을 다 어긴 인간이지요. 계명이 몇 개더라? 열 개? 왜 스무 개, 쉰 개, 백 개를 만들지. 백 개였어도 내가 다 깨뜨렸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하느님이 있어서, 내가 그 앞에 서야 될 때가 온대도 나는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당신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내가 보기엔 그게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아서요. 하느님이 미쳤다고 지렁이를 앞에다 놓고 지렁이가 한 짓을 하나하나 따지겠어요? 그 지렁이가 이웃 지렁이를 꾀고, 금요일에 고기 한 입 먹었다고 화를 내겠어요?”


‘진짜 사내란 바로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이 부러웠다. 그는 피가 뜨겁고 단단한 뼈를 가진 사내였다.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고, 기쁠 때면 아무것도 재지 않고 그 자체로 기뻐했던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나는 아나그노스티 영감을 보았다. 그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풀밭에서 쫓고 쫓기는 두 마리 노랑나비를 바라보며 웃고 서 있었다. 나이를 먹고 이젠 일이나 아내, 자식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되니 주변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조르바는 마당으로 나갔다. 울고 싶었지만 여자들 앞에서 우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남자 앞에서 운다면 말이지요. 남자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잖습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여자 앞에서 남자는 늘 자기가 용맹하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면, 이 가엾은 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끝나는 겁니다.’


조르바가 들어와 죽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목에 벨벳리본을 두르고 팔을 포갠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누렇게 뜨고 파리 떼로 덮여 있었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한 줌의 흙이구나. 배고픔을 알고, 웃기도 하고, 키스도 하던 한 줌의 흙, 한 덩이 흙이면서도 사람을 울리던 것. 지금은.. 우리를 이 땅에 데려다 놓은 악마는 누구이고 또 이 땅에서 데려갈 악마는 누구더냐!’ 조르바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은 바로 신성한 경외감이었다.


“보스, 나는 말입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고통이 심장을 찢어 놓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 심장은 이미 구멍이 숭숭 뚫리고 다 해져버렸어요. 이번에도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었으니 상처 자국이 새삼스럽진 않아요. 내 몸은 죄다 상처가 아문 자리니까요. 그래서 내가 그 고통들을 견딜 수 있는 겁니다.”


“조르바, 가엾은 부불리나 여사를 잘도 잊어버리시네요.”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만큼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조르바는 화가 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나는 어제 일은 기억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뭘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뭘 하는가?’ ‘여자랑 키스하고 있네’ ‘그래 잘해 보게. 실컷 하게나.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고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으니.’”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선 먹고 마시고 사랑하면서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있지요.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삶보다 인류의 삶에 더 관심을 두고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결국 인간은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권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이나 짐승, 나무나 별이 모두 한 목숨인데 어떤 지독한 싸움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무슨 싸움일까요? 그건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에요.”


나는 꺼져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여러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그런 말들은 그가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말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은 그 말이 핏방울을 품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웃긴가요 보스? 내게 아저씨 한 분이 있었어요. 어느 날 아저씨가 길을 가다가 비실비실한 늙은 노새를 주웠지요. 산에 버려져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대요. 우리 아저씨는 그 녀석을 집으로 데려왔지요. 그는 매일 아침 이 노새를 데리고 나가 풀을 뜯기고는 밤이 되면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마을 사람이 우리 아저씨와 노새가 지나가는 걸 보며 소리쳤대요. ‘이보게, 하랄람보스! 다 늙은걸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그러자 아저씨가 말했지요. ‘이건 똥 만드는 공장일세. 거름을 만들 공장.’ 그래요, 보스,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수도원은 기적의 공장이 될 거예요.


그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듯 그는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올랐다. 마치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은 날 어쩌시려는 거요? 그래봤자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나는 더 이상 당신이 필요치 않아요!’


나는 새벽에 일어나 해변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갔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 평생 그런 기쁨은 누려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아니,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 가능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나는 돈, 인부들, 고가 케이블, 수레 등 모든 걸 잃었다. 우리는 작은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게 정확하게 끝이 난 순간, 나는 뜻밖의 해방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빠져 있다가 저 구석에서 놀고 있는 자유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더불어 놀았다.

모든 것이 뒤틀렸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누군가는 하느님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악마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이 강력한 적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완전히 패했어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부의 파멸이 최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언젠가 조르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 무시무시한 강풍이 불었어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흔들며 뒤엎으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이미 이걸 단단히 묶어놓고 만약을 대비해 손을 좀 봤었지요. 나는 불가에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봐, 아무리 그래도 우리 오두막엔 못 들어와.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테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을 거야.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될걸.’” 조르바의 이 몇 마디를 통해, 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와 강력하면서도 맹목적인 필연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적에게 맞서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걸으며 내 적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호령했다. ‘내 영혼에는 못 들어올 거야.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테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어. 나를 뒤엎는다고? 어림없는 소리!’


“조르바, 모든 게 당신 덕분이에요. 나도 당신 방법을 써먹어볼까 해요. 당신이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던 것처럼 나도 책을 책으로 정복해 보려고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나겠죠? 구역질이 나면 다 토해 버리고 영원히 이별하는 겁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과 영원히 이별해야지. 잘 봐두자.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조르바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자.’


나는 먹이를 채는 새처럼 목을 빼고 술을 마시는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니 우리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다.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과 몸매와 몸짓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몇 년만 지나도 그 눈이 검었는지 푸르렀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어디든 함께 갈 수 있고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보스는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어요. 당신은 긴 줄 끝에 있고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자르지는 못합니다. 그 줄을 자르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를 거예요” 나는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내 상처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보스, 그건 어려운 일이에요. 아주 어려워요. 그러기 위해선 바보가 되어야 하니까요.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 걸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좋으니 잘해 나갈 수는 있겠지요. 인간의 머리는 식료품 가게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을 하니까요. 얼마를 냈고 얼마를 벌었으니 이익은 얼마고 손해가 얼마구나! 머리라는 건 이렇듯 조잔한 가게 주인 같은 겁니다. 가진 걸 다 걸어볼 생각은 안 하고 예비금이라는 걸 꼭 남겨두니까요. 그러니 줄을 자를 수 없는 거지요. 아니, 아니지! 더 붙들어 맬 테지요. 줄을 놓쳐버리게 되면 머리라는 이 멍청한 녀석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게 되지요.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으면 살맛이 나겠어요? 노랗고 멀건 카밀레차를 마시는 거나 마찬가지겠지요. 럼주 같은 맛이 아니고요. 그걸 잘라야 제대로 된 인생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노새꾼이 와서 나는 그 노새를 타고 떠났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르바가 어딘가에 숨어서 내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달려와 작별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고 손수건을 흔들며 이별하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이별은 칼로 자른 듯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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