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양자역학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을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책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불교 사상에 관한 책이라서
그런지 유독 눈이 가서 일단 책을 꺼냈다.
나는 항상 앞만 바라보며 살다가도.
문득 이렇게 옆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
세속적인 욕심과 영적인 깨달음 사이 그 어딘가에서
매 순간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세속적인 성공을 좇다 보면,
가슴 깊숙한 어딘가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큰 고통을 감내하는가'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은 어떠한 형태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갈까'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휘젓는다.
그럴 때면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책을 찾는다.
삶이란 생각보다 허무하고, 무엇보다 고독하다.
우리의 삶은 텅 빈 공간일 뿐이다.
그 무엇으로 채워넣든 상관없는.
그저 커다란 빈 그릇이다.
우리는 각자의 재료로 그릇을 꽉꽉 채워 넣는다.
불교 사상은 참으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그저 ‘종교'로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 사상이 설파하는 진리는
종교보다는 과학에 더 가깝다.
나는 이과, 공대, 엔지니어였고, 무신론자이며,
과학이 진리를 밝히는 최고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불자도 아니며, 우리 가족 중에서도
불자는 없다.
하지만, 깊이 관심을 가지기 전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불교에서 설파하는 가르침에는
유독 눈길이 갔고, 마음이 이끌렸다.
진리는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왜, 멋진 삶을 살다 갔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대부분 일맥상통할까?
시대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은 비슷한 말들을 한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깨달음에 대한 것이든
성공적인 삶에 관한 것이든
대부분 하는 말의 결이 같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고,
진리는 결코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와 양자역학과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자되었다.
현대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아인슈타인도
불교를 '우주적 종교'라 일컬었다.
불교의 사상을 살짝만 들여다봐도
20세기 초에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양자역학이 내포하는 믿을 수 없는 진리를
붓다는 이미 3000년 전부터
깨달았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현대과학에 점점 더 의존하면서,
우리는 과학을 신으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랬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기술낙관론자이기도 하다.
어릴 적의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나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던 오만한 생각이었다.
뼛속까지 공대생인 나는
세상을 과학적인 사고와 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러한 경향이 여전히 남아있긴 하다.
하지만, 과학은 그저 세상을
그리고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너무 좋은 도구일 뿐이다.
그것에도 분명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세상의 진리를 과학이라는 틀에
모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자역학이 대표적이다.
양자역학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왜 전자는 입자이며 파동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에 없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 조차
그렇게 말했다.
그저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뿐이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진리가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우주의 작은 점인 인류가 발명한 도구로
우주를 품는 거대한 진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모순적이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다.
현대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진리를 불교에서는 이미
3000년 전부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이 이중슬릿 실험 결과를 보고
'빛은 입자인가 혹은 파동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때,
3000년 전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자애로운 웃음을 머금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원래 그러하다"
즉, 불교 사상은 어떤 면에서
과학보다도 더 진보적인,
세상의 진리를 밝힐 수 있는 뛰어난 도구이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잘 들어보게, 친구여, 주의 깊게 들어봐! 나나 자네나 모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네. 지금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브라흐마가 될 테고, 언젠가는 열반에 이를 테고, 부처가 될 테지
그런데 잘 들어보게. 이 ‘언젠가’라는 말은 착각이고, 단지 비유에 불과한 거야! 우리의 사고능력으로는 어떻게 달리 상상할 길이 없지만, 그 죄인이라는 사람은 부처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거나, 어떤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네
그의 미래가 이미 그 사람 속에 깃들어 있지. 그러므로 자네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자네의 내면에서, 모든 중생의 내면에서 형성되고 있는 부처, 가능의 형태로 존재하는 부처, 숨어 있는 부처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하네."
즉, 시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시간이라는 단위로 쪼개서
세상을 바라봐야 더 편할 뿐이다.
2차원만을 인식할 수 있는 개미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보는 사과의 형태를 절대로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개미가 사과의 형태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사과를 높이 단위로 쪼개서
사과의 단면들을 순서대로 조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수십 억년 뒤, 우리가 더 고차원적인 존재로
진화한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뇌로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뛰어난 도구조차
우리 인류에게나 뛰어난 도구일 뿐,
세상의 진리를 담기에는
한없이 원시적인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야만 했고,
그 개념은 실제로 아주 편리하다.
싯다르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며, 모든 죄는 이미 그 속에 은총을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그들 안에 노인을 품고 있고, 모든 젖먹이는 이미 그들 안에 죽음을 품고 있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네."
즉, 우리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현재'의 우리 자신의 모습 속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이 모든 '나'가 공존하며,
애초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저 이해를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시점의 우리 몸과
마음 안에는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그리고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다음 생의 우리의 모든 삶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었던 나의 과거에는,
그때의 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내가 이미 함께 공존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의 나 안에는,
깨달음의 눈물을 흘리며 숨이 멎는 그 순간의 내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모든 숨어있는 부처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누군가의 영혼에는
오랜 시간 뒤 깨달음을 얻고 해탈한
부처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 진리이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회사에서 정말 싫어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우리에게 불쾌한 경험을 선사했던
그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인간도,
우리가 무지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무시했던 사람들도,
모두 그 영혼 안에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온화하고,
자애로운 붓다가 공존했었다.
우리는 항상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만,
세상의 진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느 하나가 선하기만 할 수도 없으며,
악하기만 할 수도 없다.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무언가가 공존한다.
마치, 빛을 프리즘에 쬐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색들이 펼쳐지지만,
실제 빛은 그저 하얀빛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것은 빨간색, 주황색, 초록색이라며
분류하지만, 세상에 그러한 것은 없다.
모든 색깔을 담고 있는
빛과 같은 존재들이 상호작용할 뿐이다.
다만, 우리의 인지능력으로는
그 빛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어서
우리는 프리즘을 꺼내서
그 진리의 빛을 색깔별로 쪼개놓아야 편할 뿐이다.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어라는 것도 결국 수단일 뿐이기에,
무언가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세상의 진리는 결코 '언어'라는
작은 도구에 담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언어'에만 의존하면 오해가 생긴다.
싯다르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말이라는 것은 오히려 신비로운 의미를 퇴색시켜서, 말로 표현하다 보면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고 조금씩 왜곡되며 조금씩 어리석어지거든."
붓다의 깨달음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
카톡으로만 말하면 싸울 일도,
전화로 하면 웃을 일이 되고,
전화로 하면 싸울 일도,
만나서 이야기하면 웃을 일이 된다.
텍스트는 음성을 담을 수 없고,
음성은 행동을 담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전하고자 하는 본질이나
진리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행동을 믿으라는 말이
괜히 나온 이야기가 아닌 듯싶다.
본질과 진리에 그나마 가장 가깝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일뿐이다.
말이나 목소리 같은 단편적인 것보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 그간 단편적인 면만 보고 판단했던
수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하였다.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마음을 열고, 감각을 활짝 열어야 한다.
머릿속에 지식을 가득 쌓는다고 해서
될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 화를 내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저 사람의 영헌 속에는
우리네게 행복을 주는 저 사람 또한 공존한다.
우리가 한심하게 바라보는 저 사람 속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저 사람 또한 공존한다.
앞으로 살아가며 마주하는 작은 순간들에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하고 재단하려 할 때.
가슴속에 묻혀 놓았던 이 깨달음을
잠시 꺼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