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과학 : 과학을 통해 바라보는 운명
‘운명’이란 존재할까?
운명에 대해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클리셰적인 말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그 무수한 사람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무한한 우주에서 특정한 은하계에, 그 수많은 은하계에서 태양계, 태양계에서도 하필이면 지구, 지구 안에서도 콩알만 한 이 대한민국, 그 안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한 남한, 그 남한에서도 서울(또는 특정 도시), 서울 안에서도 하필이면 그 시간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서로가 만날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그러한 만남도 결국 그저 무작위적인 우연한 사건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에, 그 확률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며, 그것이 바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정답은 없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믿고 싶지만, 그렇다 할 과학적인 명확한 근거도 딱히 없는 듯하다.
만약 조금 더 범주를 좁혀보면 어떨까?
거창한 우주적 운명이 아닌, 한 개체의 운명은 어떠할까? 인간이라는 종의 한 개체의 삶에 있어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마치 사주팔자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누구와 결혼을 하고, 어떤 성향으로 살아갈지, 어떤 이성에게 끌리는 편인지,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심지어 어떤 색깔을 싫어하는지 등 다양한 선택과 결정, 취향들이 태어날 때부터 어느정도 결정되어 있다면 어떨까?
더 멀리 나아가,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실존할까?
우리가 회사로 출근하고, 계단을 오르고, 운동을 하고, 특정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끼고, 특정한 생각을 하는 모든 행위가 진정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운명’을 과학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믿는다. 아침에 어떤 옷을 입을지, 무슨 점심 메뉴를 고를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심지어는 누구를 사랑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선택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신경학적, 환경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무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유전자라는 우리 몸의 설계도가 우리의 삶을 미리 짜 놓았을 가능성른 얼마나 될까? 즉, 생물학적으로 ‘한 인간 개체의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생물학과 신경과학을 전공한 영국의 스타 과학자 한나 크리츨로우는 『운명의 과학』에서 과감하게 이러한 의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말한다. “인간의 운명의 60~70% 이상은 유전자에 쓰여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은 우리가 만 3세 정도가 되었을 때 이미 대부분 정해질 확률이 높다”라고.
이런 충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 책은 출간 직후 영국의 각종 기관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책에서 우리의 성격, 신념, 사랑, 직관적 판단, 심지어는 우리가 살아가며 내리는 중요한 결정들조차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신경학적 메커니즘과 유전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린다는 믿음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무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미쳐버릴 것이다
인간 사회는 항상 무의식적인 힘을 두려워하며 거기에 위협적, 심지어는 악마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정신질환을 경험했거나 목격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정신이 아주 낯설고 심지어는 끔찍할 정도로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알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을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위험지대로 인식하는 것은, 무의식이 일상생활에서 맡고 있는 본질적 역할을 오해하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의사 결정과 일상적 판단의 상당 부분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게 아니고서야 우리는 결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을 들이면서 의식적으로 일일이 모든 의사 결정에 관여하고 모든 상황을 평가해야 한다면, 그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이미 직장에 나가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까지 집 정문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행동 중 상당 부분은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신경과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들 중 대부분이 ‘의식적’ 결정이 아니라, 뇌 속에서 이미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그것이 순전히 외모나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우리가 선택한 결정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지만, 실상은 유전자,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등의 생물학적 요소가 우리의 감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실험 중 하나는 이렇다. 피실험자가 특정한 움직임을 보일 때 그 사람의 뇌파를 관측하고 기록한다. 결론만 말하자면, 놀랍게도 그 사람이 '오른팔을 이렇게 움직여야겠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뇌에서는 오른팔을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즉, 생물학적인 전기 신호는 우리의 '생각',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의지'를 앞선다.
꿈, 두려움, 신념, 사랑 등 인간이 자기만의 인생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 중 상당 부분은 매일매일의 행동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인생의 선택과 성격을 만들어내는 수백만 개의 결정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내리는 선택은 우리가 경험한 감각, 기억, 감정,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 필터링된다. 단순한 식사 선택에서부터 직업 선택과 배우자의 선택까지, 대부분의 결정이 우리의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닌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지만, 이는 최근의 신경과학적 연구에서 꾸준히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다.
뇌 회로판의 구조가 우리의 성격을 결정한다
생후 처음 3년 동안에는 시냅스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형성되어 정신의 회로판인 커넥톰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이 회로판은 외부 세계에서 온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행동 반응을 빚어낸다.
우리의 성격과 사고방식은 생후 몇 년 동안 뇌가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형성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뇌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식이 오랜 기간에 걸쳐 결정되어 온 것이다. 적어도 현대 뇌과학과 신경과학에서는 그렇게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이 주장에 꽤나 힘이 실리고 있다
또한 몇몇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특히 만 3세까지의 시기동안 받은 스트레스, 애착 경험, 가정환경, 부모나 형제와의 관계 등이 성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이 시기에 인간 개체의 성격이나 기질이 모두 정해진다고 단언하지 않지만, 수많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70% 정도 이상은 이 시기에 정해진다고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애정 어린 스킨십과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성장한 아이는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회로가 건강하게 형성되지만, 반대로 트라우마나 학대를 경험한 경우 뇌의 반응 방식이 변화하여 스트레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겪은 경험이 단순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뇌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유아 시절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뇌의 시대에 들어서 부모들의 염려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개인적으로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 그중에서도 아주 잠깐 동안인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학대를 받거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뇌의 회로가 불가역적으로 변형되어 그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평생 결정된다니, 그 죄 없는 아이들은 무슨 잘못인가? 너무 결정론적인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노력해 볼 여지조차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슬픈 이야기이지만, 이런 감상적인 접근만으로는 과학적 실험의 연구 결과를 바꿀 수 없다.
다만, 다행히도 위의 실험들이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가 안도해도 될 최소한의 희망적인 여지는 있다.
최대 70%라는 말은, 누군가는 환경의 변화나 노력으로 30% 라도 그 사고회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머지 30%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만약 이러한 이론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말이다.
유전자가 삶을 결정하는가?
이 FTO 유전자 변이를 두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운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건강한 체지방 지수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최근 대부분의 실험은 우리의 건강 상태, 신체 능력, 심지어는 행동 습관까지도 유전적 요소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려받은 생물학적 요소들이 우리를 강하게 지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만은 더 이상 게으름의 징표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특정 유전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식품업계의 탐욕스러운 판매 설계, 비만인 사람들의 실재하는 게으름 등의 요인에 의해 이 주장은 꽤나 희석될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높은 불안 수준을 가지고 태어나며, 이는 특정 유전자 변이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행복감, 성취욕, 감정 조절 능력 역시 유전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우울감을 느끼는 정도마저 이미 3세 이전에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특정한 유전적 요인들은 우리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감각추구형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보다 도전적인 삶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중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은 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순한 기질적 차이를 넘어, 삶을 어떻게 설계하고 살아가는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는 행동 중에서 좀 더 개성적인 측면이라 생각하는 부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분명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인 산물이고, 그래서 의식적 통제 아래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도 사실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강화된 선천적 요인에 의해 깊숙한 수준에서 형성이 된다.
성격, 자기 자신과 세상의 작동 방식에 대한 믿음, 위기에서 반응하는 방식, 사랑, 위험, 부모 역할, 사후 세계에 대한 태도 등등 대단히 추상적인 의견과 성격적 특성들은 어느 것이든 뇌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의해 깊숙한 곳에서 빚어진다.
저자는 심지어 외향 또는 내향적인 성향조차 타고난다고 말한다.
사회적 기질에는 두 가지 뚜렷한 유형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가지 별개의 뇌 프로필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눈확앞이마겉질의 부피가 더 크다. 이런 사람을 외향성이라고 부르자.
이들은 그 부피에 비례해서 더 넓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참여한다. 이런 사람들은 개개의 인간관계에 헌신하는 시간을 아껴 인간관계의 질은 조금 희생해서 사람을 얕게 만나는 대신, 거기서 아낀 역량을 더 큰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투자한다.
반면 내향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유지하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 포함된 우정은 더욱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면 이 스펙트럼에서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든 간에 뇌 화학 수준에서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우정과 동맹 관계를 가꾸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상으로 여긴다.
흥미롭게도 사회성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덜 활발한 사람들보다 눈확앞이마겉질에 베타엔도르핀 수용체가 훨씬 더 많다. 로빈은 선천적으로 뇌에 이런 수용체가 많은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사회적 자극이 있어야, 즉 많은 친구를 두어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수용체가 적은 사람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그보다 적어도 같은 만족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외향인들은 내향인들에 비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얻는 쾌락(호르몬 분비 작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일지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짜 현실을 보고 있는가?
~중략~ ‘버전’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뒤에서 보겠지만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짝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뇌의 독특한 왜곡, 내재된 필터와 인지편향 등, 자기만 갖고 있는 뇌의 특성 덕분에 자기만의 맞춤형 ‘현실’에서 살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정확한 스냅사진이 아니라 그냥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전에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저자는 우리가 물리세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객관적인 ‘객관적 현실’보다는 ‘주관적 허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유명한 철학적 논제를 생각해 보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가벼운 사고실험을 한 번 해보자.
우리 앞에 위의 사진과 같은 찻잔이 하나 놓여있다.
그 안에는 노란빛의 차가 담겨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액체를 노란색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그 액체의 색깔을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인식한다. 시각 수용체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북이는 어떠할까?
인간은 가시광선 영역의 빛만 인식할 수 있다.
파장이 더 긴 적외선과 파장이 더 짧은 자외선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거북이는 적외선과 자외선까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북이는 저 찻잔 안의 노란색을 어떤 색으로 인식할까? 우리가 보는 흔한 노란빛보다는 신비로운 어떤 색으로 인식할 것이다. 우리는 거북이가 인식하는 그 영롱하고 신비로운 색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액체의 ‘진짜’ 색깔은 무엇인가?
거북이의 색이 진짜인가,
적록색맹인 사람의 색이 진짜인가,
아니면 평범한 우리의 색이 진짜인가?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경과학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단순한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주관적 경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감각 정보를 해석할 때, 과거의 경험과 기대치를 바탕으로 현실을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고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각자 다른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지각의 차이는 때로는 착각을 유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얼굴 인식에 특화된 뇌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구름 같은 자연이나 자동차에서도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신경학적 필터가 정보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준다.
패턴을 얼굴 모양으로 배열하는 편향은 사실상 인류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우리는 세상 어디를 가든 얼굴을 보는 일에 대단히 익숙해져 있다.
이런 원형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강력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뇌의 깊숙한 지각 회로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미지들을 볼 때 그림자가 알려주는 단서를 무시하고 뒤집어진 마스크를 그냥 또 하나의 얼굴이라고 계속 가정하게 된다.
뇌는 지속적으로 기존의 경험을 끌어들여 자신이 지각하는 것에 대해 가정을 하고 있다. 이것은 생존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기술이다. 덕분에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빠른 추론을 내리고 엄청난 정보가 홍수처럼 입력되는 상황에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뇌는 우리를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할 때, ‘단순화 필터’를 적용시킨다. 물리세계의 모든 정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뇌는 몇 초도 안 돼서 과부하가 올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지각을 통해 물체를 인식할 때는 물론이고,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도 되는지를 판단할 때도 이성과 자유의지보다는 무의식과 직관의 입김이 지배적이다. 흔히 ‘악’으로 규정되는 선입견이나 편견은, 이를테면 이분법적 사고 등은 사실 우리가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우리의 지각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정말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 : 조현병과 LSD 약물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물리세계의 지각 및 해석 과정이 정상적인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은 사물의 모양을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며, 뇌에서 감각 정보를 필터링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해 모든 자극을 동등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오히려 우리와 다르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처럼 ‘단순화 필터’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조현병 환자가 왜곡된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정반대로 평범한 우리가 오히려 왜곡된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데이비드와 그의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미세한 양의 LSD나 위약을 투여한 다음 뇌를 스캔해 보았다. 그는 아주 적은 양일지라도 LSD를 투여했을 때 서로 다른 뇌 영역의 활성 수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특히나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 약물이 거의 뇌 전체의 스위치를 켜는 것을 관찰했다.
현대 신경과학 연구는 환각제(LSD, 실로 사이빈 등)가 인간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뇌는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필터링하지만, 환각제는 이러한 필터링 과정을 방해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예술계에서 마약을 복용한 사람들의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좋은 작품을 내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평소에는 결코 지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감각으로 느껴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창작하고, 평범한 우리가 그것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봤을 때, 우리는 생전 처음 겪는 신비로운 감각적 경험을 한다.
앞서 언급한 간단한 사고실험에서 거북이가 인식하는 색처럼, LSD를 복용한 사람들이나 조현병 환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진짜' 현실 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진짜'인지 또 다른 허구인지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지만 말이다.
LSD의 영향에 놓인 뇌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들을 차버리고 아기 때부터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만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효과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환각제가 PTSD, 우울증, 불안 장애와 같은 정신 질환 치료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각 상태에서 인간은 고정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으며, 이는 기존의 치료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실제로 현재 시점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꾸준한 논의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LSD 같은 마약으로 발생하거나, 조현병 환자들이 겪는 환각은 단순한 착각인가, 아니면 되려 그것들이 객관적인 현실일까?
사실 환각 경험이 단순한 뇌의 오류인지, 아니면 인간의 인식 범위를 확장하는 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연구는 환각 상태에서 인간이 더 창의적인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음을 시사하며, 이는 우리의 의식이 신경학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인류는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 사이를 진자의 추처럼 오가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초반에는 인간의 특성 중 많은 측면이 내면 깊숙이 새겨져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라 믿었다. 이런 관점 때문에 우생학이라는 잔혹 행위가 생겨나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다 1990년대 말에는 추가 반대쪽으로 다시 출렁거려 과학계와 시대정신 모두에서 뇌 가소성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었다. 이때는 세상이 소통, 기술적 발달, 개인적 발달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추가 다시 반대쪽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뇌가 바람처럼 가소성이 뛰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뇌 그 자체는 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어떤 인생의 궤적을 그릴 것인지 결정하는 회로가 이미 배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부화하고 있다.
커넥톰학, 유전체학, 단백질체학 연구로부터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점점 더 이런 개념도 붙잡고 씨름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 속에서 살아간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저자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운명의 많은 부분이 유전자에 의해 이미 결정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지만, 불변의 진리는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여부를 떠나 극단적인 결정론은 허무하고 공허할 뿐이다.
설령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고 해도, 우리가 이를 인식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결국, 자유의지가 실재하든 아니든, 중요한 사실은 ‘자유의지’는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믿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AI와 생명공학, 그중에서도 유전공학 분야는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한다. 어쩌면 인간은 생물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 감각, 행동, 판단 등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기계적인 알고리즘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그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