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잠이나 자라"
어두운 밀실 속의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고, '띠링'하는 알람벨이 울린다. 수학 문제 몇 개를 풀어야만 꺼지는 알람이다. 나는 실눈을 뜬 채로 힘겹게 알람을 끈다.
하루 중에 유독 나는 아침에 깨어나기가 힘들다.
아마도 그 까닭은, 까뮈의 말을 빌리자면, "잠결에 나 자신이 나의 몸과 온전히 하나라는 느낌을 받고 있다가, 이제 그만 세상의 체제 속으로 다시 들어서기 위해 멍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키는 게 그리 내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일단 눈을 뜨고 기계적으로 그 세상의 체제 속으로 풍덩, 하고 온몸을 내던질 준비를 한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는, 샤워기 호스를 집어든다. 따뜻한 물로 몸을 먼저 헹구고, 아직 젖어있는 몸과 머리털에 각종 화학 제품을 칠한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상태에서 칠해야 거품이 더 잘 난다. 그리고 거품이 더 잘 나야 깨끗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더러워진 몸을 빡빡 씻는다. 사실 짧다면 짧은 그 밤사이에 얼마나 더러워졌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씻으면 기분은 상쾌하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대략 37조 개의 세포들을 하나하나 잘 씻겨주자는 비과학적인 생각도 해보며 발가락 사이까지 깨끗이 닦는다.
그렇게 광장에 나갈 준비를 한다. 드라이어로 몸과 머리를 말리고, 항상 마무리는 얼음장같이 찬 물로 몸을 헹군다. 이렇게 하면 보통 아침이 개운하고,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세상의 체제 속으로 더 빠르게 몸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로 바디로션이라는 또 다른 화학제품을 깨끗해진 온몸에 덧칠한다. 나는 이 부드러운 촉감과 향이 좋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새로운 속옷을 꺼내 갈아입고, 그 옆의 옷장을 연다. 그 옷장 안에는 여러 벌의 와이셔츠와 정장들이 나란히 걸쳐져 있다. 그들은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언제나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평일의 그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중 제일 오른쪽에 걸린 정장을 고른다. '오늘은 너의 차례이다' 하면서.
그렇게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발목까지 덮이는 검은색 양말도 신는다. 정장을 입을 때 발목의 살색 부분이 보이면 이상하게 보인다. 손목에는 금속으로 된 차가운 시계도 찬다. 그리고 향수라는 또 다른 화학제품을 몸에 뿌린다. 목과 가슴팍에 총 세 번 정도 펌프질을 한다. 가장 안쪽에 입는 옷에 뿌려야 향이 오래간다. 오늘은 우드향이 나는 화학제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예쁘게 포장시킨다. 보기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해서.
현관 앞으로 나가서 길쭉하게 서있는 거울을 바라본다.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어느 날은 생기가 넘치지만, 어느 날은 초점이 없다. 어느 날은 안광이 거울을 뚫고 나올 것 같이 맑고 빛난다. 다른 날은 거울 속의 내가 괴물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어떨 땐 흐리멍텅한 눈이 마치 죽은 동태눈 같을 때도 있다. 나란 사람은 그중 무엇일까. 뭔들 어떠하리. 일단 오늘은 갈색 구두를 신는다. 그게 오늘 고른 옷과 어울리니까.
허리를 굽혀 두 번째 손가락을 발 뒤꿈치에 대고 구두 안으로 발을 집어넣어 보지만, 오늘도 실패다. 결국 구둣주걱의 힘을 빌린다. 손가락을 펼쳐보니, 손톱과 피부 사이의 경계가 쓸리면서 벌겋게 부어올랐다. 왜 항상 구두를 신을 때는 이 부분이 이렇게 쓸려야만 할까. 처음부터 구둣주걱을 사용하면 될 것을.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풀려있는 왼쪽 구두의 신발끈을 묶는다. 겨울이라 그런지 무릎을 꿇은 바닥이 유독 더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광장에 나가기 직전에는,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 가면을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 가면을 쓴다. 써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의 의지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그 가면은 이 체제에 몸을 던지기 위해 누구나 지불해야 하는 입장료 일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가면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가면이고 어느 것이 진짜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무심하다. 차갑다. 냉정하다. 감정이 없어 보인다. 조용하다. 무게감이 있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무섭다. 말을 걸기가 어렵다. 표정이 없다. 부끄럼이 많아 보인다. 소심해 보인다. 내성적으로 보인다. 겸손하다. 착하다. 성격이 좋다. 낯을 가리는 것 같다. 싸가지가 없다. 재수가 없다. 까칠해 보인다. 딱딱해 보인다. 카리스마가 있다. 어두워 보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 침착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싹싹하다. 에너지가 넘친다. 친화력이 좋다. 일을 잘한다. 손이 빠르다. 덤벙댄다. 그리고 항상 웃는다. 긍정적이다. 허당 같다. 단순하다. 막내 같다. 애교가 있다. 재미있다. 웃기다. 잘난 척한다. 순수하다. 순진하다.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낙천적이다. 무던하다. 민첩하다. 친근하다. 따뜻하다. 밝다. 해맑다. 들떠있다. 항상 신나 보인다. 친구가 많아 보인다. 열정적이다. 도전적이다. 자신감이 넘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떠한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 모든 것이다.
나는 때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것이 의도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누군가의 앞에서는 이렇고,
또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는 저렇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이렇고,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저렇다.
혼자 있을 때는 이렇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저렇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고,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저렇다.
하루에도, 심지어 같은 공간에서도
시간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타인이 나를 정의하는 기준은 결국, 오로지 그들 각각과의 상호관계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10명을 만나서 대화하면 나는 10개의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각각의 자아들은 대개 큰 결은 비슷하겠지만, 가끔은 극적으로 다른 경우도 있다.
나는 누군가에겐 사랑스러운 사람이며,
누군가에겐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철없는 아이 같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에겐 혐오스럽고 재수 없는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큰 영감과 힘이 되는 사람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오로지 내적인 관점에서만 보아도, 내 안에 불변하는 자아라는 것은 결코 없다.
나는 하나의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그중 어떨 때 어떤 자아를 선택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주로 혼자 있을 때, 밀실 속에서 나의 에너지는 내면을 향한다.
나는 밤이 되면 내면의 감각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자 집중한다. 그 깊은 곳으로, 그 황홀경으로 나는 빠져든다. 그 느낌이 너무 좋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어둡고 축축한 기운이 가득한 날도 있고, 충만함과 환희로 가득 찬 날도 있다.
우울감과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는 날도 있다.
또, 외로움과 고독과 공허함의 고통이 사무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때는 그 외롭고 공허한 느낌이 너무 두려웠다. 어딘가로 피하고만 싶었다. 그냥 모른 체하고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그 느낌이 너무 오래되어서 까마득하지만, 차라리 죽는다면, 언젠가 심장이 멈춘다면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 듯하다.
그때는 손이 닿는 대로 일단 뭐든 집어서 텅 빈 마음을 채우려고 했었다. 누구라도 일단 만나고, 어떤 믿음과 이념으로라도 일단 머리를 채우고, 무엇으로라도 영혼을 채우고 싶었다. 피상적인 쾌락에 의지한 적도 있다. 내 영혼 안에 채워지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을 정도로, 그냥 일단은 그곳을 채울 무언가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때의 나는 가슴이 뻥 뚫린 그 느낌이 더 괴로웠다. 그리고 이 느낌은 누구나 언젠가 겪게될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저 아직 그때가 오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뜬금없지만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운좋게도 그 ‘때’라는 것이 평균보다 빠르게 온 삶을 살아온듯 하다.
어쨌든, 당연하게도, 그 시기를 겪다 보면 결국 불순한 것들로 마음과 몸과 생각과 영혼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채운다는 행위를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오히려 더더욱 비워내야 한다. 구역질이 나고 장기가 다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비워내야 한다. 온몸으로, 온 힘으로 지금까지 생각 없이 먹어댔던 것들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일단 뱉어내야 한다. 그렇게 비워진 것들은 어차피 나중에 새로운 것으로 채우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간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피하려 해 봤자, 피하려 할수록 그것들은 나를 지독하게 따라온다. 도망가봤자 고통의 그림자는 더욱 커지고, 발버둥을 쳐봤자 난 그들의 손바닥 안일뿐이었다. 눈 가리고 아옹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잠시 잊혀질 뿐. 때가 되면 그들은 조용히 나를 감싸 안고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한다.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물론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것은 결코 없으니까. 내가 아직 모르는 또 다른 진리와 깨달음이 저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조만간 이리로 오겠지, 하며.
아무튼 그 고통을 견뎌낼 유일한 방법은,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느낌이 들더라도 일단 굳게 일어서서 당당히, 아니 당당한 척 맞서는 것이었다. 한없이 나약한 이 몸으로, 그 미약한 힘과 에너지로, 서서히 나의 정신과 영혼을 엄습하는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었다.
나의 어둡고 축축한 밀실은 그러한 시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어느 정도 그 밀실의 퀘퀘한 냄새를 즐길 줄 안다.
깔끔하고 정돈된, 잘 다듬어진, 그리고 향기로운 화학제품 냄새가 풀풀 나는 광장도 좋지만, 결국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곳은 이곳 밀실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또 생각해 보면, 가끔씩 어둡고 축축하고 우울할 뿐이지, 매번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살아간다. 그저 기계처럼.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광장을 사랑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광장의 사람들은 결코 서로의 밀실을 상상하지 못한다. 굳이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광장의 사람들은 각자의 안경에 비치는 형태로 서로를 판단한다. 그게 편하다.
광장의 사람들은 서로의 밀실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부끄러워서일까?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서일 것이다.
물론 서로의 밀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방의 벽지가 어떻고, 인테리어가 어떻다며 서로 재단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광장에서 서로의 밀실로 옮겨가는 그런 과정과 경험은 언제나 황홀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광장에만 남겨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러한 관계는 소중하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확률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나조차도 종종, 아니, 사실 대부분의 경우, 누군가를 나만의 편협한 잣대로 판단하고 재단한다. 그게 편하니까.
종종 이분법적 사고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것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도구 없이 살아가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는 그렇게 수많은 판단을 모두 동시에 복잡하게 처리할 수 있게끔 진화하지 않았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밀실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밀실은 한편으로 우리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밀실이 무너지면, 광장의 삶은 반드시 금방 무너져 내린다. 광장의 삶이 무너진다고 해서 반드시 밀실의 삶이 녹아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별다른 경계심 없이 누구에게나 그 밀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꽤 많은 경우, 누군가에게 밀실을 과감하게 공개했다는 사실은 되려 화살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 어두운 밀실을 서로 공유하는 행위는 한때는 유대의 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또 생각해 보면 구태여 밀실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있는 사람이 별안간 자기 속옷을 지나가는 저 행인들에게 굳이 내보여줄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나 또한 그렇다. 굳이 남들에게 나의 밀실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 엿보려고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어두운 방 문을 꽉 닫고 문 앞에 서서 막기도 한다. 이젠 돌아가라고. 왜냐고? 이곳은 온전히 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굳이 당신들을 들여놓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럴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다. 밀실의 존재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나는 그저 ‘그냥저냥 괜찮은‘, ’썩 나쁘지는 않은’ 사람 정도로만 남고 싶다. 몇 주 뒤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광장의 사람들이 날 좋아해 주거나 좋게 생각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도 짐이다. 이미 난 어깨에 충분한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것만 해도 내 삶은 충분히 버겁다.
그리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하길 두려워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는 더 나아가 진실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밀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과 밀실에 대해 논하다니, 그보다 더 큰 시간낭비와 정신적 고문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입은 유독 무거워진다. 입을 움직이는 운동에너지를 소모시킬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럴 때는 침묵만이 유일한 탈출구일 뿐이다. 침묵은 때로는 수다스러운 입방정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하면 그들은 상대방을 그저 단순하고,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웃고 만다. 의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겐 나도 그저 그런 광장의 사람일 뿐이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라는 사람은 그들의 삶에 결코 존재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참을 수 없다.
또 그 광장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얻는다.
심지어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얻기도 한다.
물론 이 작고 어두운 밀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나에게는 광장도 그리고 밀실도, 둘 다 필요하다.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광장 속의 내가 진짜 나일까,
아니면 밀실 속의 내가 진짜 나일까?
그것을 감히 어떻게 정의 내린단 말인가? 그것은 그것대로 오만한 생각이다. 광장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광장 속의 내가 진짜이고, 밀실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밀실 속의 내가 진짜인가? 당연히 그것도 아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이를 잘 왔다 갔다 하면 그만이다. 마치 진자의 추처럼. 그 추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두 상태 모두가 ’진짜‘ 나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고민할 필요 자체가 없다. 이분법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아무튼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의 균형이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삶은 비극에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진다. 광장의 삶과 밀실의 삶 그 사이를 잘 왔다갔다 해야한다.
지나치게 광장에만 치우쳐진 삶은 가볍고 공허하다.
지나치게 밀실에만 치우쳐진 삶은 무겁고 탁하다.
모든 과정이 그저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시간은 내가 없어도 잘만 흐르고,
세상도 잘만 돌아간다.
나는 그저 나의 작은 날갯짓을 계속하면 될 뿐이다.
가끔 보면 누군가는 나의 그 작은 날갯짓을 거대하게 느끼기도 한다. 우러러보기도 하고, 부러워하거나 존경을 표하며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부러워할 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작은 날갯짓을 있는 그대로 작게 본다. 한없이 작고 미약하다고 또는 허황되다고 비웃고 괄시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이 거대한 날갯짓을 못 알아보다니. 역시 바보가 따로 없구나"
그렇게 미약한 날갯짓을 하다 보면 가끔은 돌아가기도, 멈춰 서기도, 때로는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고 한들, 그게 그리도 중요할까?
어차피 삶이라는 여정에서 스스로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말은, 돌아간 것이 아닐 수도, 멈춰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확률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우세하다.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그리 오만하게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 외롭고 고독한 여정 중에,
때때로 외로움과 고독은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망망대해 같은 이 세상 속에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냐고.
너라는 섬만 외롭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지 않냐고.
나는 그들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되묻는다.
“언제는 혼자가 아니었는가?”
그들은 당황한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말한다.
“대답해 보라. 언제는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대들이 나를 온전히 내버려 둔 적이 있었는가? 또, 앞으로도 그럴 날이 존재하기나 할 것인가? “
그들은 침묵한다.
정말로 그렇다. 진정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는가? 심지어 밀실을 공유할 정도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사람이나 수 십 명의 광장 속 사람들과 함께할 때도 말이다.
광장 속에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이다. 또 다른 오만이다. 혼자라는 것은 항상 내 몸속에 휴대하고 다니는 밀실이다. 결코 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소중하게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광장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조차 말이다. 그들의 소음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어딘가에 고정시켜 놓아야만 한다. 어느 지점에서는 아무리 흔들고 건드려도 아예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단하게.
많은 경우, 광장 속의 군중들은 정말이지 혼자 있을 때보다 더더욱 내게 혼자인 느낌을 한 아름 선물해 준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느낌을 사랑한다.
가끔 삶이 외롭거나, 힘들고 고독하다고 느낄 때면,
그저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묻는다.
“저 작디작은 반짝이는 점들이 보이는가?”
대부분의 그 별들이 우리가 사는 이 지구보다 몇 배는 더 크다. 하물며 우주 안의 먼지인, 지구 속의 티끌 같은 우리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심각하게 생각하고 축 쳐져있는가?
아쉽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은 어차피 내가 없어도 잘만 돌아간다.
나는 그저 그 작은 날갯짓을 계속하면 된다.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비웃고, 회의론자들은 조소 섞인 표정을 보내지만, 그저 두 귀를 닫고 묵묵히 계속하던 일을 하면 된다. 어차피 진정으로 의미가 있어서 하는 일은 없다. 자연은, 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우주는 그 자체로는 항상 무의미했고, 무의미하며, 무의미할 것이다.
과거에는 정보의 양이 가치의 척도였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수한 정보들 속에서 소음을 차단할 줄 아는 것이 오히려 큰 가치가 되는 시대이다. 귀를 열기보다는 닫는 것이 최선일 때도 많다. 정보를 많이 모으기보다, 정보와 소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이다.
나는 그저 그렇게 작은 날갯짓을 계속하다가, 지치면 조금 쉬면 된다. 도망치고 싶으면 가끔은 도망쳤다가도, 다시 힘이 생기면 몸을 일으켜 다시 가면을 쓰고 광장으로 나가면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밀실로 다시 돌아와 또 다른 가면을 쓰면 된다.
복잡함의 끝은 단순함이고,
삶의 끝은 어차피 죽음이다.
이 모순 덩어리인 세상이 이제는 우습기도 하다.
그저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냥 웃자. 단순하자.
깊게 생각해 보면 깊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그렇다. 심각할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복잡하고 깊은 생각들은 잠시 접어두자.
그런 것들은 때가 되면 잠시동안 다시 꺼내보면 될 일이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것을 꺼내봐야 할 순간은 자연스레 나를 찾아올 것이다. 굳이 내가 힘쓰지 않더라도.
죽은 줄 알았던 쇼펜하우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한다.
조용히 하고, "그냥 잠이나 자라."
그러고는 다시 눕는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그냥 잠이나 자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