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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낙관주의자 : 인류의 번영은 계속될 수 있을까?

집단지성, 아이디어 간의 섹스

by 이도한
'나를 위해' 일하는 수십 억 명의 사람들

아침에 일어나서 시끄럽게 울리는 스마트폰의 알람을 끄고, 시간을 확인하고, 밀려있던 메시지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용변을 보고 깨끗이 샤워를 한다. 그리고 옷장에 걸린 옷을 꺼내 입고 출근을 한다. 버스나 지하철이나 자차를 이용할 것이다. 그렇게 출근을 해서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보다가 점심시간에는 맛있는 밥을 먹고, 잔업을 마무리하고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온다.


이 짧은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우리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사소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일들을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신비로울 따름이다. 도무지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대부분 스마트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반도체 회로판의 구성과 구체적인 작동원리도, 충전되는 방식도,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 어디에서 물을 길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정수하여, 어떤 배관을 통해 마시는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 하수처리가 어떻게 되고 우리가 배설한 이물질들은 자연계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점심시간에 우리가 먹는 밥과 반찬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밥상 앞으로 오게 되는지 우리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다. 우리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약속한 적당한 양의 화폐만 있으면 이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이 모든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회에 딱 한 가지만 생산해 내면 된다. 그것이 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하는 것이든, 반도체 공장에서 부품을 생산하는 일이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든, 머리를 깎는 일이든, 심지어 성(姓)을 파는 일이든, 불법적으로 마약을 유통하는 일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중 단 한 가지만 이 사회에 제공하더라도,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우리가 풍요롭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를 우리에게 기꺼이 바친다.


수 만년 전의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들은 상상도 못 할 것들이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더라도, 각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주먹도끼를 다듬을 줄도 알아야 하고, 사냥도 할 줄 알아야 하며, 사냥한 먹잇감을 조리할 줄도 알아야 하고, 부싯돌로 창촉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약초로 상처 부위를 감쌀 줄 알아야 하고, 매머드를 추적할 줄 알아야 하며, 10여 명의 다른 사냥꾼들과 협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단 한 가지 종류의 가치만 세상에 내놓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모든 가치를 누릴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수많은 베스트셀러 서적을 발간한 영국의 저술가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매트 리들리는 그의 저서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그 이유를 크게 '교환과 분업', '아이디어 간의 섹스(집단지성)', '진보의 유전적 누적'을 든다. 그는 책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극단적 회의론자와 비관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결국 멀리 보면 인류의 번영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분업과 교환 : 인간 본성에서 시작된 진보의 엔진

"혁신은 개인의 뇌가 아닌 아이디어의 섹스에서 나온다. 분업을 하면 숱한 이점이 생기며,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애초에 인간의 지혜가 이를 내다보고 의도한 결과로 분업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분업은 그런 선견지명과는 관계없는 인간의 본성 중 어떤 성향, 무언가를 다른 것과 맞바꾸고 거래하려는 성향의 필연적 결과다. 그 출현에 이르는 과정은 비록 느리고 점진적이었지만"

- 국부론, 애덤 스미스


"문명사회의 개인은 수많은 사람의 협력과 지원을 상시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생애를 통틀어도 불과 몇 명 되지 않은데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 모든 서비스의 보고를 이용하는 대가로 당신이 생산하는 것은 단 한 종류뿐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당신은 수많은 사람의 발견과 발명, 노동의 대가를 소비한다. 그런데 당신이 생산, 판매하는 것은 다음 중 한 가지뿐이다. 머리 깎기, 볼베어링 만들기, 보험 상담, 간호, 개 산책시키기... 당신을 ‘위하여’ 일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일을 변함없이 하고 있다. 각자 생산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직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노동 시간을 투입하는, 단순화된 제품 한 가지."


"시간, 그것이 핵심이다. 달러나 옛날 화폐로 쓰였던 조개껍데기나 금은 잊어버리자. 어떤 것의 가치를 재는 진정한 척도는 그것을 얻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만일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구할 때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게 마련이다."


"부유함의 진정한 척도는 시간이라는 점에 다시 한번 주목하자. 밴더빌트나 헨리 포드는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에 더 빨리 가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비용을 벌기 위해 더 적은 시간을 일해도 되게 해 주었다. 당신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을 만들어준 셈이다.

이렇게 절약한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생산품을 소비하는 데 쓰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그 누군가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혹은 그 시간을 누군가를 위한 물품 생산에 쓴다면, 이를 통해 당신은 더욱 부유해진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어느 쪽이 더 진보했겠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물었다. ‘직접 잭나이프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철광색을 캐내서 녹이고, 제작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소년 쪽인가, 아니면 같은 기간 동안 교육기관에서 야금학 강의를 듣고 아버지에게 기성품인 로저스 펜나이프를 받은 아이 쪽인가?’

내 생각은 소로와 반대다. 후자 쪽이 엄청나게 진보한다. 다른 것들을 배울 시간적 여유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완전히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매일 아침 당신은 스스로 가진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게 될까?"


"동물들의 경우, 개채 수준에서 유년기로부터 노년기 혹은 성숙기로 나아간다. 개체는 주어진 수명 내에서 자신의 본성이 다다를 수 있는 최대한의 완성도를 성취한다. 하지만 인류는 다르다.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종으로서도 진보한다. 모든 세대는 그 이전 세대까지 선조들이 이미 축척해 놓은 기반 위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생활방식은 떠들썩하고도 지속적으로 바뀌어왔다. 인간에게 어떤 점이 있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인간의 본성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주먹도끼를 잡았던 손은 오늘날 마우스를 쥐는 손과 똑같이 생겼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먹을거리를 찾고, 섹스를 갈망하며, 자손을 돌보고,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며, 고통을 기피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종에 고유한 많은 특징 역시 그대로 남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깊숙한 오지로 여행을 간다 해도 당신은 예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노래, 웃음, 연설, 성적 질투심, 유머감각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중 어떤 특징도 침팬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말했듯, “일단 하층민의 신분 상승이 탄력을 받으면 부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더 이상 주요한 이익의 원천이 아니게 된다. 대신 대중의 수요에 맞추려는 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처음에는 불평등을 스스로 두드러지게 만들었던 힘이 나중에는 이를 사라지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하려는 성향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에 새겨진 무언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은 한없이 나약한 신체와 생존력을 가진 우리 인류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 준 몇 안 되는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책의 저자인 리들리는 생태문학의 고전으로 유명한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주장을 비판한다. 소로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강조했다. 소로는 사람들이 모여서 분업화를 이룬 사회가 아닌 고독한 자연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삶을 찬양하며, 도시에서 분업하는 삶보다 자연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이 더욱 진보하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소로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도시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은 갑자기 자연에 내던져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농사하는 법도, 집을 짓는 법도, 밥을 짓는 법도, 사냥하는 법도 모른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고독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기술들을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는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리들리는 소로에게 "왜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가?" 라고 반문한다. 인류의 번영은 분업과 교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것보다 오히려 소로가 추앙하는 삶처럼 다른 사람과 협력할 줄 모르는 것이 생존에 더욱 치명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혼자서 끙끙대며 모든 것들을 해내느니, 그 시간에 단 한 가지의 가치만 세상에 내놓고 나머지 시간은 더 의미 있는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렇게 남는 여가시간에 소로가 그리 찬양하는 자연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소로와 같은 삶의 방식을 택한다면 인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종할 것이다. 자연에서 인간 개체 각각은 한없이 나약할 뿐이다.


물론 소로와 리들리의 주장은 관점과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리들리가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다.


"진정한 의미의 풍요는 화폐가 아닌 시간의 풍요이고, 분업은 모든 인류에게 시간의 풍요를 가져다준다."


근로자들의 노동활동, 기업가들의 아웃소싱, 투자자들의 레버리지 모두 결국 시간의 풍요를 위한 행위들이며, 질과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리들리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분업과 교환의 시스템에서 살고 있고, 이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우리의 생존 방식이다.






우리는 왜 도시를 사랑하는가

"사람들은 고층 빌딩 안에서 보다 더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서로 교환하는 것을 선호한다. 금융업처럼 실물을 다루지 않는 업종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엄청난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표현에 따르면, “소로는 틀렸다. 시골에 사는 것은 지구를 보살피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고층 빌딩을 더 짓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는 우리의 하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이 결정판이다. “내 집이나 거리의 가게들에서 동물(인간이라는 동물을 말한다)이 하는 일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피로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모터가 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이제부터 모든 허드렛일은 모터가 도맡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정부는 권력이 제한적이거나(약탈 행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정도로 약해서는 안되지만) 공화제로 통치되거나 혹은 쪼개져 있는 편이 노동의 분업이 발전하는 데 뭔가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강한 정부는 그 정의상 독점 체제이기 때문이다. 독점 기관은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고, 침체하고, 스스로에게(고객이 아니라)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군주들은 독점 기관을 좋아한다. 스스로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는 팔거나 자기가 총애하는 인물에게 넘긴 뒤 세금을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표현에 따르면, ‘소로는 틀렸다. 시골에 사는 것은 지구를 보살피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고층 빌딩을 더 짓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층 빌딩 안에서 보다 더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서로 교환하는 것을 선호한다. 금융업처럼 실물을 다루지 않는 업종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엄청난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다."


리들리는 사람이 한 군데에 모임으로써, 즉, 도시를 형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용을 찬양한다. 사실 이는 도시뿐 아니라 농사를 짓는 농촌에서도 적용되는 명확한 논리이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납득이 되는 주장이다. 각 개체 개개인의 관점이 아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약 80억 명 정도 되는 지구의 모든 인류가 소로의 삶의 철학을 따라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자급자족하려고 한다면, 지구의 환경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파괴될 것이고, 땅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 있는 고층 빌딩들을 단면으로 잘라서 지구 표면을 덮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도시를 전혀 이루지 않고 현재의 수준으로 지구에서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생각해 보자. 인류가 모여서(도시를 이룸으로써) 창조해 낸 효율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모두가 소로처럼 자급자족하며 비효율적인 에너지 소비를 지속한다면 천연자원과 연료들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하늘의 오존층은 금세 사라질 것이며, 북극의 빙하는 금세 바다로 변할 것이다.


이것이 리들리가 생각하는 우리 인류가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이며, 도시를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도시 형성 트렌드는 이미 메가 시티를 형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지 오래됐다. 가능한 최대한 많이 모여서 사는 것이 한정된 지구의 에너지로 인류가 최대한 오래 존속할 수 있는 방법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혁신의 열쇠 : 아이디어 간의 섹스

"일반적으로 인류가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까닭은 큰 뇌, 언어 사용, 사회적 학습 또는 모방 능력 덕분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리들리는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봐서는 소용이 없다. 뇌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뇌와 뇌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집단적 현상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집단지능이 출현해서 인류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류의 지능이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특성을 갖게 된 것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아이디어들이 서로 만나 짝을 짓고 섹스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선사시대의 어느 시점에 뇌가 크고 학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일단 교환이 시작되자 갑자기 문화가 누적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경제적 진보’라는 위대한 실험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기술은 번식한다. 섹스를 통해서.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스필오버(남들이 아이디어를 조금 훔쳐간다는 사실)는 발명가를 짜증 나게 하는 뜻밖의 장애가 아니다. 발명활동이 바로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필오버를 통해 하나의 혁신은 다른 혁신을 만나서 짝을 짓는다. 근현대의 역사는 아이디어들이 서로 만나고 뒤섞이고 짝을 짓고 돌연변이를 해온 역사다. 지난 2세기 동안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것은 그 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아이디어들이 서로 잘 섞였기 때문이다. 이는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는다."


"지식이 놀랍고 멋진 것은 진실로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발명, 발견이 고갈된다는 것은 심지어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내 낙관주의의 가장 큰 근거는 여기에 있다. 정보계의 멋진 점은 물질계보다 훨씬 광대하다는 것이다.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의 우주에 비하면 물질적 우주는 보잘것 없이 작다. 폴 로머가 표현한 대로, 하드디스크가 1기가바이트에 담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수는 우주에 있는 원자 수의 2,700만 배에 이른다. 그런데 혁신에 한계가 없다면 어째서 모든 사람이 미래를 그토록 비관적으로 보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가 예시한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보자. 증기기관의 밸브 여닫는 일을 하던 소년은 시간 절약을 위해 자기 일을 대신해줄 장치를 만들어 달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남에게 알리지 않은 채 무덤으로 갔을 것이다. 어쩌면 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개선안을 공유했을 것이다."


"헨리 포드는 자신이 스스로 발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적이 있다. ‘몇 세기 동안의 업적을 배경으로 다른 사람들이 발명, 발견한 것들을 단지 조합해서 자동차를 만들었을 뿐이다.’ 새 물건은 다른 물건으로부터 온 혈통을 물려받지만, 옛 디자인은 버리고 새 형태를 취한다."


현대 세계의 비밀은 막대한 상호연결성에 있다. 지구상 모든 곳에서 아이디어들이 다른 아이디어들과 점점 더 복잡한 난교를 벌이고 있다. 전화와 컴퓨터가 섹스해 인터넷을 낳았다. 최초의 자동차는 마치 ‘자전거 남편을 둔 마차가 낳은 자식’처럼 보였다. 플라스틱에 대한 아이디어는 사진화학 산업에서 나왔다. 카메라 알약(알약형 내시경)은 위장병 전문의와 유도탄 디자이너 간의 대화에서 탄생했다. 거의 모든 기술은 잡종이다.


리들리는 인류의 번영, 나아가 혁신은 한 개체의 뇌 용량이나 신체능력 발달 덕분이 아니며, 그보다는 '집단지성'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들리의 도발적인 표현에 의하면, 인류의 다양한 아이디어는 그들끼리 '섹스'를 통해 번식하고, 이것이 혁신의 비밀이라고 한다. 리들리에 따르면, 아이디어 간의 비유기적 교배와 번식은 생물학적인 유기적 개체들의 번식보다 훨씬 더 많은 이점이 있다.


생물학적인 유기적 번식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 종 사이에는 교차 교배가 일어날 수 없다. 감수분열 시 염색체 쌍을 형성하는 문제 때문이다. 실질적이고 극복이 불가능한 장벽이다. 어떤 동물이 실질적으로 두 품종으로 분화하면, 둘 사이에는 후손이 생기지 않거나 생기더라도 노새처럼 불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종의 정의, 한 종과 다른 종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또한 근친교배를 통해서는 지속적인 번식도 불가능하다.


이에 비해 신기술(새로운 아이디어)은 기존 기술들(기존의 아이디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생기는데, 이때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커진다. 생물학적 번식에서 제한되는 방해요소들이 대부분 제거되는 것이다. 실제로 헨리 포드는 자신이 스스로 발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몇 세기 동안의 업적을 배경으로 다른 사람들이 발명, 발견한 것들을 단지 조합해서 자동차를 만들었을 뿐이다.” 즉, 새 물건은 다른 물건으로부터 온 혈통을 물려받지만, 옛 디자인은 버리고 새 형태를 취한다.






신뢰와 교환: 우리가 낯선 사람과도 협력할 수 있는 이유

"인간은 낯선 사람들과 마치 친구인 양 교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타인을 신뢰할 줄 아는 인간의 재능 덕분이다. 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본능적 자질이다. 인간은 낯선 사람들과 마치 친구인 양 교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타인을 신뢰할 줄 아는 인간의 재능 덕분이다. 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본능적 자질이다."


"현대 사회에서 놀라운 점은, 당신과 서로 모르는 가게 주인이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보이지 않지만, 현대의 모든 시장거래 뒤에는 신뢰 보증인이 숨어 있다. 봉인된 포장, 보증서, 고객 의견 설문지, 소비자 보호법, 브랜드 자체, 신용카드, 현금 지불 보증 등."


"유명 슈퍼마켓에서 유명 브랜드의 치약을 살 때 당신은, 튜브 안에 혹시 물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포장을 뜯고 치약을 손가락에 짜볼 필요가 없다. 그 가게가 가짜 상품 판매를 처벌하는 법의 적용을 받는 가게인지 아닌지를 알 필요조차 없다. 그저 다음과 같은 것만 알면 족하다. 이 대형 소매점과 치약을 만든 대기업이 내가 몇 년이고 계속 물건을 사러 오기를 열성적으로 바란다는 것, 그리고 이 간단한 거래 위에는 ‘평판을 잃을 위험’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 이 그림자 덕분에 나는 이 치약 판매자를 아무 걱정 없이 믿을 수 있다."


- 이베이 일화 : 초기 인터넷 시대에 익명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도록 하는 것이 이베이의 숙제였다. 돈이 오고 가는 거래를 낯선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에서 성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했다. 신뢰구축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개별 거래가 끝날 때마다 고객에게 피드백을 요청하고, 판매자에 대한 구매자의 평가를 게시하는 것이었다.


"~중략~ 물론 2008년 금융 위기의 대부분이 이런 사례였다. 은행들은 자신들이 하찮은 거짓 증서(스스로가 실제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거래는 붕괴되었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다른 경우라면 잘못된 신을 믿는다고 서로 죽이려 했을 사람들이 런던의 거래소 객장에서 만났을 때는 서로를 정중하게 대했다.’"


"<도덕 감정론>에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이 제아무리 이기적이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그 본성에는 어떤 고결함이 존재하는 것이 명백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번영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인 이 때문이다. 설사 그로부터 얻는 것은 타인의 행복과 번영을 보는 즐거움일 뿐일지라도.’

한편 <국부론>에서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동업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타인의 박애심에만 의존해서 이를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잘될 가능성이 훨씬 큰 방법은 따로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기심 때문에 그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의 구별을 멋지게 흐트러뜨렸다. 만일 당신이 남을 기쁘게 함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이기적인가 아니면 이타적인가? 철학자 로버트 솔로몬의 표현을 빌려보자.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좋아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해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일’을 반드시 할 것이다.’"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나약한 신체 조건으로도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리들리가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많은 포유류들은 다른 포유류를 신뢰할 수 있다. 개코원숭이, 침팬지, 돼지, 늑대, 쥐 모두 유대감을 느끼며 가족들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우울감도 느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깊은 유대관계를 맺은 타인을 신뢰할 뿐이다.


반면, 우리 인류는 처음 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 보는 사람도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발명해 냈다. 우리는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신뢰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신뢰할 수 있고, 그 대상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화폐, 법인, 종교, 국가, 이념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러한 능력은 개개인의 신체적인 능력, 지적 능력보다도 훨씬 더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무기이다. 10명, 50명, 100명이 단합할 수 있는 포유류는 지구상에 존재할지 몰라도, 1백만 명, 1000만 명, 1억 명 이상이 단합할 수 있는 포유류는 아직까지는 인류가 유일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포유류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혁신과 발전을 가져온다.






무엇이 이노베이션을 움직이는가? : 돈, 시장, 공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는 우리의 하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이 결정판이다. “내 집이나 거리의 가게들에서 동물(인간이라는 동물을 말한다)이 하는 일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피로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모터가 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이제부터 모든 허드렛일은 모터가 도맡아야 한다.”


"무엇이 이노베이션 엔진을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다음의 해답은 돈에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혁신을 장려하는 방법은 자본과 재능을 합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사업가라면 누구라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자본과 재능을 분리해 놓는 데 능했다. 발명가들은 자신들을 지원해 줄 돈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기 마련이다.

18세기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우위에 있었던 점은 두 가지다. 첫째, 대외무역 덕분에 집단적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둘째, 혁신가들에게 자금을 나눠줄 자본시장이 상대적으로 효율적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창의성이 폭발한 것은 많은 부분 샌드힐 로드의 벤처자본가들 덕분이다. 벤처투자 기업 클라이너 퍼킨스 콜필드가 없었더라면 아마존, 컴팩, 지넨테크, 구글, 넷스케이프, 선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로마시대의 여러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일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한 남자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깨지지 않는 유리 제품을 발명했다고 실물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보상을 기대한 것이다. 황제는 비법을 아는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티베리우스는 그의 목을 베개 한다. 신제품이 금의 상대적 가치를 폭락시킬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 일화의 교훈은(사실이든 아니든) 로마의 발명가들이 자신들의 노고에 대해 부정적인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당시 벤처자본이 너무나 희귀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자금을 지원받는 유일한 방법이 황제를 찾아가는 것이었다니 말이다."

"제국시대 중국도 현상 유지에 위협이 되는 발명 재능을 가진 모든 사람의 의욕을 꺾으려 애썼다. 그 신호는 강력했다. 명나라에 파견됐던 어느 기독교 선교사의 기록을 보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활동이 즉각 금지됐다. 그의 노력이 보상보다는 처벌을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990년대 미국 특허청은 유전자 조각에 특허를 허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렸다. 정상 유전자나 결함 유전자를 찾아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유전자 염기서열의 조각들이 대상이었다. 만일 이런 특허가 허용됐다면 인간 유전자 염기서열 분야는 혁신이 불가능한 영역이 되었을 것이다."


"대략 1800년 이래로 훨씬 쉬워졌고 최근에는 극적으로 쉬워진 하나의 활동이 있으니, 바로 ‘공유’다. 정보는 여행과 통신 덕분에 훨씬 빠르게 멀리까지 퍼졌다. 신문과 기술전문지와 전보는 가십과 아이디어를 똑같이 빠른 속도로 퍼뜨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아주 정밀하지는 않지만 독창적이고 상당히 정확했다. 하지만 결코 항해에 활용되지 못했다. 천문학자들과 선원들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지프 슘페터가 지적했듯이, 사업가를 밤에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라이벌들의 가격 인하가 아니다. 자신의 상품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 혁신적 기업가들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기업은 다른 사람들의 소비를 돕는 방향으로 생산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자조집단이다. 시장의 번성이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정신을 자극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식인 계급은 일반적으로 상업을 경멸한다. 상업은 구제할 수 없을 만큼 속물적이고 평범하며 타락하기 쉬운 취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과 위대한 철학이 상업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테네와 바그다드를 방문해 보라.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알콰리즈미가 사색할 여유 시간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지 물어보라. 피렌체, 피사, 베네치아를 방문해 미칼란젤로와 갈릴레오와 비발디가 받은 보수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아보라. 암스트레담과 런던을 찾아가 누가 시피노자, 렘브란트, 뉴턴, 다윈에게 자금을 제공했는지 조사해 보라. 상업이 번성하는 곳에서 창의성과 측은지심이 함께 꽃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아주 정밀하지는 않지만 독창적이고 상당히 정확했다. 하지만 결코 항해에 활용되지 못했다. 천문학자들과 선원들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지프 슘페터가 지적했듯이, 사업가를 밤에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라이벌들의 가격 인하가 아니다. 자신의 상품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 혁신적 기업가들이다."


책에서 리들리는 낯짝이 뜨거워질 정도로 상업, 교환, 시장을 찬미한다. 자본, 시장, 교환이 혁신의 열쇠라고 말하며, 역사적인 과거 사례들을 들며 그 세 가지 요소가 억압된 환경에서는 혁신과 진보라는 엔진이 멈춰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혁신과 진보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환경이 중요하다. 자본, 시장, 교환이 배제된 환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라도 대중들의 선택을 받을 수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 없다.






비관주의보다 낙관주의가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


"루이스 맨델은 미국인들 중 '신용카드에 찬성하는 사람보다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현대 세계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기술적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혐오한다는 역설 말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기술이 멋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변화를 우울해하거나 성가셔한다.'

그렇다면 발명가는 불운하다. 사회를 부유하게 만드는 근원이건만 그가 하는 일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1679년 윌리엄 패티는 말했다. “새로운 발명이 처음 제시되면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반대한다. 그리고 불쌍한 발명가는 모든 종류의 성마른 위트에 융단폭격을 당한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19세기의 가장 큰 발명은 ‘발명하는 방법’을 발명한 것이었다”라고 썼다."


"비관주의자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항상 존재했고 언제나 환대를 받았다. 애덤 스미스가 산업혁명 출범기에 쓴 글을 보자. ‘다음과 같은 주장을 담은 책이나 팸플릿이 출간되지 않은 채 5년이 지나간 일은 거의 없다. 국부가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는 둥, 영국 인구가 줄었다는 둥, 농업이 무시되고 있다는 둥, 제조업이 쇠퇴했다는 둥,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둥의 주장을 입증하는 척하는 출판물들 말이다.’"


"1720년 투기 버블이 붕괴된 뒤 공포와 혼란 속에서 열린 의회에 대고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1830년이 되면 영국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부유해지며, 사망률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역마차가 런던에서 요크까지 가는 데 24시간 밖에 안 걸리고, 사람들은 바람을 이용하지 않고 항행하는 데 익숙해지고, 말이 끌지 않는 탈것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고 말이다. 이 같은 예측을 접한 우리 선조 의원들은 <걸리버 여행기>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예측은 옳았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더 강하게 들어맞았다."


"아이자이어 벌린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도자들은 어떤 먼 미래의 사회적 목표를 고취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 살아 있는 개인들의 선호와 이익을 무시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참함의 공통된 원인이다.’"


"대부분의 기술적 변화는 기존의 기술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통해 일어난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가게 작업장의 수습생과 기구들 사이에서,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 이용자들이 있는 직장에서 일어난다. 지식인들의 상아탑에서 나온 지식이 전달, 응용된 덕분인 경우는 희귀하다. 과학이 쓸모없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17세기에 중력과 혈액순환을 발견한 것은 인류의 지식창고에 보태진 빛나는 업적이다. 하지만 이런 발견은 인간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면화조면기와 증기기관만큼 기여하지 못했다.

심지어 산업혁명 후기 단계에 사용된 기술들 중에서도 작동원리를 모르는 채로 개발된 것들이 차고 넘칠 정도다. 생물 약재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아스피린은 아무도 작용원리를 짐작도 못하는 상태에서 한 세기 이상 두통치료제로 사용됐다. 페니실린의 박테리아 살해 능력을 인간이 이해하게 된 것은 박테리아가 내성을 갖게 될 즈음이었다. 라임주스는 비타민C가 발견되기 몇 세기 전부터 괴혈병 예방에 쓰였다. 식품을 통조림으로 보존하는 기술은 그게 왜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할 세균이론이 나오기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책의 말미에서는 이 책의 제목이 왜 '이성적 낙관주의자'인지 이해가 되는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비관주의는 항상 낙관주의와 공존했으며, 낙관주의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인류는 항상 진보해 왔다. 세계 1, 2차 대전, 금융위기, 리먼 브라더스 사태, 9.11 테러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인류는 진보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결국, 그 상황을 타개할 만한 아이디어들이 서로 '섹스'하여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낳고, 더 그럴만한 대의명분을 낳고, 더 잘 작동하는 시스템을 낳아왔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생태계 파괴, 주식 시장 붕괴, 경기 침체, 문화 전쟁, 종교 전쟁, 이념 전쟁, 인종차별, 남녀차별, 인구 감소, 식량 부족 등 등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암울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그 위기를 극복해 왔고 끊임없이 진보해 왔다. 되돌아보면, 과연 지금 우리 인류는 과거에 우리가 걱정했던 것만큼 공포심으로 가득 찬, 암울하고 비관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리들리가 주장하는 바가 우리가 아무런 의지도 없이 손 놓고 있기만 해도 인류가 알아서 발전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결국 그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직접 영향을 받는 종속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그러한 위기에 대한 방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말이다.


비관주의는 항상 인기를 끌었다. 항상 그럴듯해 보였다. 학창 시절 우리나라가 물부족 국가라는 전 국가적 가스라이팅이 당연했다. 이것이 대표적인 근거 없는 비관주의이다. 비관주의자의 주장은 언젠가 한 번은 맞는다. 두 번 맞을 수도 있다. 어쩌다 몇 번 그렇게 결과를 예측한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하면, 그 비관주의자는 마치 신처럼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식 시장에서의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 피터 린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투자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의 비관론을 무시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리들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그 소음의 바닷속에서 비관론은 가끔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똑똑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낙관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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