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사람들, 그리고 공허를 판매하는 사람들
성공이 '유행'인 시대
요즘 유튜브와 SNS, 그리고 서점에는 수많은 자기 계발과 성공에 대한 콘텐츠들이 난무한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대부분 결이 비슷하다.
"30살에 30억을 벌 수 있었던 비결"
"기상시간 오전 4시,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 나는 여행하며 하루에 2시간만 일한다"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 위한 5가지 비밀"
앵무새같이 그들은 비슷한 말들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공허한 젊은이들은 깊게 감명받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착각한다. 지금까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다른 세계를 보게 해주는 제3의 눈을 떴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점점 그 메신저를 맹신한다.
마치 성공이 유행인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성공', '자유', '경제적 자유', '노동하지 않는 삶'이라는 캐치프레이즈 팻말을 들고 떠들어댄다. 유행이라는 말 외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차피 이러한 현상은 머지않아 지나갈 것이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절, 세계적인 양적완화로 모두가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시기에 골프와 오마카세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가 유행이었듯이.
성공팔이들의 성공 공식
가만히 보면 종교와 굉장히 비슷하다. 고성장 시대의 막을 달리는 이 시대의 청춘들은 공허하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등기를 치는 날이 과연 내게 오기나 할까 싶다. 인터넷에는 미국 주식, 비트코인, 알트코인, 선물 옵션 상품 같은 투자 혹은 상품 소싱, 블로그, 유튜브로 큰돈을 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내가 지금 매일 하고 있는 노동을 20년을 사회에 제공해도 결코 얻을 수 없는 돈이다.
성공팔이들은 '너도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넣고, 언제까지 바보같이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릴 것이냐며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며 허무감과 공허함을 조장한다. 마치 나만 빼고 많은 사람들이 '똑똑'하게 돈을 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싶으면 월에 3만 원짜리 멤버십을 가입하면 된다고 한다. 혹은 1회에 4~5만 원 하는 강의 링크를 보내준다.
모두가 노동 소득이 주가 아닌 자본 소득이 주인 삶을 꿈꾼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렇다. 그것이 나쁜 삶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 자체의 의미를 변질시키면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욕망을 미끼로 양산되고 있는 성공팔이들의 잔치는 분명히 경계해야 될 현상이다. 몇몇을 제외한 그들은 헛된 욕망을 품게 하며, 심지어 본인들조차 그러한 성공의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실상 주위를 둘러보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성공한 사람이나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사실 그것이 당연하다. (오로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개체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진실을 왜곡한 채, '가상의 성공적인 삶'이라는 이상향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팔아댄다. 신기한 건 그렇게 본인들의 가짜 성공 스토리를 상품화시켜서 살을 붙이고, 과장하고, 예쁘게 포장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소득금액증명원이나 법인의 재무제표 또는 사업소득 과세표준을 공개하는 사람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찐따남에서 자수성가로 연봉 10억을 찍은 성공 스토리’라는 클리셰적인 표어로 가짜 성공을 판매하는 성공팔이 유튜버 누군가가 생각난다. 최근 그 사람이 원고인 소송의 판결문이 나왔다.
연봉이 10억이라고 주장하며 그 가짜 성공 스토리를 기반으로 구독자를 모으고, 성공팔이 강의와 블로그, 유튜브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공허한 대중들의 코 묻은 돈을 착취한 그 유튜버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법원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셈이다.
본인 개인의 연봉이 10억은커녕, 2019년 기준 해당 '사업체'의 순이익이 1억 9천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순이익이 10억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회사의 '매출총액'이 10억 원에 도달한 적은 있다고 한다. 이 10억 원에서 원가, 인건비, 임대료, 홍보비, 제세금 등 뗄 거 다 떼야 그 사람의 주머니에 떨어지는 돈이다. 본인이 '연봉 10억'을 찍었다는 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말이 좋아 말장난이지, 사실 사기에 가깝다.
하지만 많은 공허한 대중들은 이러한 판결문이나 재무제표, 과세표준 증명원 등 '팩트'에는 관심이 없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감정'과 '느낌'이다. 그런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고, 동기부여가 되는 느낌이 들며, 실제로 자기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말하며 본인들의 교주를 두둔한다. 사실, 그런 대중들은 따지고 보면 잘못이 없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렇듯 가짜 성공 스토리를 판매하는 공급자들, 소위 '성공팔이'들의 성공 공식은 정해져 있다. 물론, 그들은 절대로 이 공식을 공개하지 않는다.
1. 우선, 적당한 성과를 이룬다.
2. 돈이 많은 척을 하며, 그 적당한 성과를 크게 부풀려서 홍보한다.
3. 자본주의 시대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공허한 사람들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자극한다.
4. '성공하는 법'에 대한 강의, 종이책, 전자책, 유튜브, SNS 콘텐츠 등을 판매한다.
5. 그렇게 콘텐츠를 판매한 대금이 실제로 쌓인다.
6. 처음에는 '돈이 많은 척'이었지만, 이제는 실제로 돈이 많은 편에 속해진다.
7. 그렇게 번 돈으로 다양한 사업과 투자를 확장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완벽한 선순환 구조이다.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부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으니,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교인들은 그것 보라고, 우리 교주님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부자라고 하며 더 큰 종교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게 된다.
성공팔이의 주력상품 : 성공(X), 공허함(O)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오만하게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밀며 그들은 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로 인해 실제로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많다면, 거기에 대고 돌을 던질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아주 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원래 사업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사기와 한 끗 차이이다. 현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은 상호주관적 실체, 즉, 허구이다. 돈, 기업, 종교, 이념, 법인, 국가 같은 개념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고통을 느낄 수도, 우리가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다면 그 허구들은 실재가 된다.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등 저서에서 반복해서 주장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존재한다. 왜 갑자기 세상에 이러한 성공팔이들이 많아졌고, 또 왜 그것을 그저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성공팔이에 현혹되지 않고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물론, 진실을 선택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든 파란 약을 먹든 그 선택에 옳고 그름은 없으며, 어떤 선택에도 나름의 정당성이 존재하듯 말이다.
그러나 감히 한 가지 단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성공팔이들의 엉덩이를 멍청하게 뒤쫓는 삶은 결국 공허하게 마무리될 확률이 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무엇인지 모르며, 설령 비슷하게 알았다고 해도 결코 수많은 대중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할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익구조는 성공을 갈망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계좌에서 돈을 빼가는 것이다.
즉,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객들은 언제까지나 성공을 '갈망'해야만 한다. 절대로 성공을 '이루면' 안 된다. 영원히 갈망해야만 한다. 성공을 이뤘다면 더 이상 고객들이 그들의 콘텐츠를 소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성공팔이들의 고객 중에 실제로 성공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고객은 그 성공팔이의 경쟁자가 된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한 논리 구조이다. 실제로 그들이 파는 것은 '성공'이 아닌 '성공을 향한 갈망', 즉 공허함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성공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떤 것이라도 시도해보고 싶은 자들에게 그들은 마치 구원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전부터 그러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의문이 들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얻을 수 있는 양질의 정보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전 세계의 수많은 현인들과 실제로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놔두고 그들의 실속 없는 껍데기뿐인 성공 강의를 듣고 앉아있을까? 시간이 넘쳐나는 것만 같다. 라고.
'성공적인 삶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담론을 제쳐두고도, 오로지 자본주의적 성공을 원한다면, 젠슨 황, 일론 머스크, 저커버그, 샘 알트먼, 제프 베조스, 알렉스 카프, 피터 틸,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하워드 막스, 손정의, 피터 린치, 워렌 버핏, 레이 달리오, 잭 웰티 등(셀 수도 없다)의 자서전과 인터뷰나 그들이 남긴 수많은 생각과 글들을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그리고 확률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에 비하면 어떠한 것도 증명해내지 못한, 혹은 증명해 봤자 적당한 수준의 성공이며 그것이 지속가능할지 장담할 수도 없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유튜브 구독자 20만 명', '인스타 팔로워 수 10만 명'을 외치며 마치 엄청난 성공을 해본 척 홍보해 대는 성공 호소인들의 콘텐츠를 소비할까?
왜 공허한 우리 세대의 청춘들은 성공 포르노에 혹할까?
그렇다면 왜 유독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성공 포르노에 쉽게 빠져들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우리 부모 세대는 고도성장의 시기를 살았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조금만 노력하면 집을 살 수 있었고, 열심히 다니면 회사가 정년을 보장해 주었고, 부동산이나 주식은 차치하고 예금 적금만 들어둬도 자산이 불어났다. GDP 성장률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경제성장 그 자체가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시대였다. 그 세대들은 그저 그 성장곡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성장은 끝났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출산율은 곤두박질치고, 부동산은 이미 기득권의 것이 되었고, 노동시장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고, 연봉상승은 인플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한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사업이나 투자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그리고 그렇게 믿는 젊은 세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진짜 문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아는데,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청춘들은 좌절하고 희망을 잃는다.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다. 누군가가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명확한 길을 안내해 주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느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성공담을 믿기로 선택한다. 그 믿음을 선택하는 순간, 결과는 장담하지 못해도 마음은 편하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중세시대에는 ‘신’, 즉 종교가 이러한 역할을 해주었다. 신도들은 신이 말하는 절대적인 삶의 진리만을 추구하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그 ‘자유’를 누릴 정도로 큰 그릇이 못한 것이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신들의 시대가 끝나자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새로운 종교가 되었고, 우리는 자유로부터 오는 책임을 회피하며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 이렇게 말한다.
“누가 우리 삶을 어디로든 이끌어 주세요.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성장이 멈춘 시대는 희망이 빠져나간 진공의 시대다. 이미 정해진 고성장 곡선이라는 트랙은 사라졌고, 경쟁은 무한해졌으며, 보상은 불확실해졌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단기간에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들,
‘나도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감각,
즉, 판타지적 성공 서사에 집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이 성공포르노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정서적 진통제이다. 현실은 막막하지만, 동기부여 영상, 손쉬운 성공을 위한 비밀에 대한 영상을 보며 그들은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저 자리에 설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믿음은 위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회피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성공포르노의 본질은 존재 불안에 대한 해소 욕구다.
우리는 모두 존재에 대해 불안해한다.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전애는 이 질문에 종교, 공동체, 국가, 이념이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대답들이 무너졌다.
인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니체가 말했듯 '신은 죽었다'
국가는 또 어떠한가? 진정으로 애국심을 느끼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몇이나 될까?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조차 그때 당시에 유행했던 상품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자리를 자본주의적 성공 서사가 대체했다. 자본주의적 성공은 곧 정체성이고, 곧 개인의 존재 이유가 된다.
성공한 사람은 삶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존재의 이유조차 의심받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점점 더 '무언가 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산다. 그건 실존적으로 매우 피로한 삶이다.
성공 포르노 중독을 치료하는 해독제는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포르노 중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 방법이 존재하기나 할까?
사실 이러한 이념적 유행은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한 개인으로서 이 거대한 흐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수많은 성공팔이들에게 우리의 영혼과 무의식을 쉽게 팔아버릴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의식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나는 이게 단순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도로 의식적인 탈중심화가 필요하다.
즉,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성공’, ‘자유’, ‘노력’, ‘가치’라는 말들에 의심을 품는 것이 시작이다. 이 단어들은 본래 중립적인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담론과 환상이 덧칠되어 서서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는 그러한 프레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특히, 비교의 프레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성공포르노는 ‘비교’를 먹고 자란다. 그 구조 자체가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너는?”이라는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게으른 사람, 패배자,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삶의 본질은 경쟁과 경주가 아니다. 개개인의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삶의 의미를 경쟁과 경주에 두면 그 끝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고,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즉시 소비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불안해하고, 더 공허해지고 있다.
왜일까?
이제는 더 이상 정보가 많은 사람이 경쟁력을 갖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 어떤 것을 ‘믿지 않을 수 있느냐’, 무엇을 ‘나의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이다.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정보이며, 어떤 것이 소음인지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적 시선과 철학이 필요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정보가 곧 권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양질의 교육을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다. 심지어, 200달러 정도만 주면 유전자 키트를 구입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킬 수도 있다.
즉, 정보의 양 그 자체는 이제는 의미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빅데이터와 Ai의 탄생이 가져올 거대한 변화의 서막은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그 정보들이 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건 왜 나에게 유용하다고 느껴졌지?"
"이건 누가 만든 프레임이지?"
"내가 이걸 믿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만이 소음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철학'은 플라톤이나 니체의 사상처럼 심오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두고 살 것인가?"
따위의 질문에 스스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답이 없으면, 우리는 남이 만든 성공, 남이 만든 루틴, 남이 만든 콘텐츠 속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즉, 각자의 철학이 없으면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만들어 놓은 꿈을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할 것이며, 그 공허는 끔찍한 후회와 고통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