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2001)
한 철학자가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외계인 여행자를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쭉 훑어본 후,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 그리고 당신들의 천체, 태양, 별 모두는 오직 인간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두 외계인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중략)… 그칠 줄 모르고 웃어댔다.
- '미크로메가스' : 철학사, 볼테르(1725)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이 광막한 우주공간 속에서 우리의 미천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데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올 징조는 하나도 없다.
-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2001)
새가 왜 노래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새들은 노래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라, 노래함이 새들에게 곧 기쁨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왜 하늘의 비밀을 헤아려 보려고 골머리를 썩이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현상은 다채롭기 이루 말할 수 없고, 하늘은 숨겨진 보물로 가득하다.
이는 오로지 인간의 정신이 새로운 양분을 취하는 데 모자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우주 형상의 신비’, 요하네스 케플러(1596)
지루한 지구에서 한참 높이 올라가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대자연이 과연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이 지구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온갖 가치를 다 퍼부어 놓았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고공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수만 있다면 집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집안 구석에서 이루어진 일들의 잘잘못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더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내려서 결국은 모든 것들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만큼이나 사람들이 잘 살고 있고, 잘 꾸며진 세계가 한둘이 아니라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다 일컫는 것들에 찬미를 보내지 아니하게 되고, 또 일반 사람들이 정성을 쏟아 추구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오히려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다.
- ‘천상계의 발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1690년경)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세상의 천체들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없는 한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 ‘천상계의 발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1690년경)
이제야 우리는 스스로를 1조 개의 별들을 각각 거느린 1조 개의 은하들이 여기저기에 점점이 떠 있는 저 광막한 우주의 바다에 부질없이 떠다니는 초라한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겁도 없이 우주라는 바다의 물맛을 보았고 그것이 자신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 '코스모스', 칼 세이건(1980)
1977년 NASA가 쏘아 올린 무인 우주 탐사선인 보이저 1호는 목성과 토성을 탐사한 뒤,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 우주로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1990년, 임무 종료 후 보이저 1호는 목성과 토성의 임무를 마치고,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탐사선의 에너지 절약과 시스템 보호를 위해 카메라 전원을 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 칼 세이건이 제안했다.
"지구를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사진을 찍어 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작고, 외로운 존재인지 스스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NASA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그 이유는
1. 보이저 1호의 위치상 태양 쪽을 향해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그러면 강력한 태양빛 때문에 카메라 센서가 파손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
2. 지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진으로 찍어봤자 점처럼 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과학적 가치가 낮음.
3. 이미 주요 임무를 마친 상태라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실용주의적 판단임.
정도였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과학 이상의 철학적, 인간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그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최초의 문명이자 세대다. 그걸 후세에 남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
결국 NASA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는 태양계 가장자리에서 60억 km 떨어진 거리에서 카메라를 뒤로 돌려, '태양과 태양계 행성들을 촬영하는 가족사진'을 찍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사진이다.
후담으로, 그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저 1호의 카메라는 실제로 영구히 꺼졌다고 한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그 순간은 보이저 1호가 지구를 바라본 마지막 시선, 마지막 셔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우주 속 티끌 하나로서의 지구, 인류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건 단지 ‘우주 사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집 하나'의 기록이다. 즉, 칼 세이건이 보여준 건, 과학적 용기를 넘어서 철학적 상상력과 시적 통찰이 현실을 바꾼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오만하게도 스스로를 신의 개입이 필요할 값어치가 있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그의 공책에 간략하게 썼다.
“겸손하게 인간은 동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다윈은 말을 잇는다.
천문학은 겸손과 인격수양의 학문이라는 말이 있다.
밤하늘의 별은 항상 겸허한 마음을 자아낸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허황된 느낌이 들 때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수많은 천체들이 부유하고 있다. 그들은 내게 겸손을 가르쳐준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과 무기력에 빠질 때도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들은 내게 한 인간 개체의 삶의 덧없음을 가르쳐준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심각하게 생각할 만한 것들은 전혀 없다.
대부분 일단 그저 '멍청'하게 살아가면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그저 남은 여생 하루하루를 미약한 힘으로나마 있는 힘껏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