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때가 기억난다. 대학생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친척의 비보였다.
또 그렇게 한 사람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인간의 생이란 이토록 무상하다.
대단한 것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처럼 비장하게 등장하지만, 떠나갈 때는 이토록 허무하기 그지없다. 한편으로는 편안하고 안락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끝없는 고통의 연속인, 이 연극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니, 슬픈 일이어야만 할 것 같다. 이 세상의 중력은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는 마음이 무거워야만 하며,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미소를 짓더라도 씁쓸하게 웃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이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는 사실은 유감스럽다. 그분의 가족들도 안타깝다. 아비를 잃은 자식들의 슬픔을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진심으로 슬프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 슬프지만은 않다. 가장 좋아하는 옷에 지워지지 않는 기름때가 묻었을 때 느끼는 감정보다도 더 약한 정도의 슬픔이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더 슬픈 척을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면을 쓴 연극 같기도 하다. 여기에 나와 비슷한 배역을 맡은 배우는 누가 있을까, 하고 상상도 해본다.
그분은 내게 그리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이렇다 할 기억도, 추억도 많이는 없다. 그와 별개로, 나는 친척들로부터 인간들의 근본적인 간사함과 비열함과 이기심을 배웠다.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 준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그런 걸까. 한국 사회에서 으레 친척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그 역할만 하고 빠르게 내 삶으로, 그 지겨운 쳇바퀴 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피가 조금 섞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땅히 해야 한다고 믿는, 부질없는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직관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남들을 따라, 그들의 눈치를 보며 함께 '슬픈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닐 거라고.
사람들은 죽은 사람 앞에서는 참으로 관대해진다. 우리는 죽음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살아있던 시절 그렇게 증오하고 욕하던 사람도, 그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기억을 미화하며, 죽음을 동정하고 애도하며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유명인들의 경우, 갑자기 죽은 후에는 대중들이 그 사람을 신격화하는 신기한 현상마저 일어난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인간은 결국 누구나 죽기에, 머지않아 적어도 이번 생에는 틀림없이 들이닥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면죄부라도 받고 싶은 걸까? 왜 사람들은 유독 죽은 사람에게만 그렇게 관대해지는 걸까? 있을 때 잘하지는 못하고, 떠나간 후에야 갑자기 그렇게 아쉬워하는 걸까?
그 슬픔은, 진정으로 떠나간 그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면 있을 때 충분히 잘하지 못 했던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후회에서, 혹은 그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걸까? 결국 그 슬픔의 눈물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장례식은 꼭 슬퍼야만 할까?
누군가의 죽음이 전혀 슬프지 않고, 그저 그렇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본다. 감정이 메마르고 공감능력이 결여된, 심지어는 사회성이나 근본적으로 악한 사람 취급을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중력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어떤 죽음은 전혀 슬프지 않을 수 있다.
전혀 슬프지 않지만, 슬픈 척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들과 하나의 문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죽음 = 슬픔’이라는 방정식은 우주의 규칙이 아니다. 이렇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정이나 방식도 결국 하나의 문화일 뿐이다.
인도네시아의 토라자족의 장례식은 잔치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으며, 울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 춤, 잔치 음식이 등장한다. 이들은 죽음을 단순한 상실이 아닌 공동체와 삶의 연장으로 보고, 장례를 위해 오랜 준비기간과 큰 비용, 심지어 빚까지 지기도 한다고 한다.
가나의 프람프람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관(棺) 운반자들의 사례도 있다. 그들은 관을 어깨에 지고 일정한 안무와 음악과 함께 행진하는 모습이 유명하다. '관짝춤'이라고 불리며 한때 SNS에서 밈이 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아샨티(Ashanti)족의 전통에서 유래되어 자메이카 등 카리브 제도에서 행해 장례 문화도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사망 후 9일간 가족·친구가 모여 음식·음악·이야기·놀이를 함께 하며 떠난 이를 기념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파티처럼 분위기가 전환되기도 하며, 마지막 날에는 영혼이 본격적으로 ‘출발’한다고 여겨져 특별한 의식이 치러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장례식에서, 이들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큰소리로 웃으면 제재를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즉, 무언가 장례식에서는 '슬프고, 마음이 무거워야 할 것만 같은' 느낌도 결국 하나의 문화일 뿐,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관념과 사고방식에서 조금만 벗어나 있으면 그 사람을 재단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 많은 경우, 그것을 그 사람의 타고난 인성 또는 덕성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을 뿐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관념은 일시적이지만,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꽤 많은 경우, 관념과 본질을 혼동한다. 나이는 관념이며, 경험은 본질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돈, 국가, 이념, 기업, 종교 등 우리가 실존한다고 믿는 것들의 대부분은 관념일 뿐이다.
대개 본질적인 것들은 우리의 직관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