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침-건배乾杯
젊은 사람이면 금방 갈 거리인데도 바닥에 주저앉아 쉬었다 걷다를 반복하며 집으로 향한다.
바닥에 주저앉아 끊어질듯한 허리도 달랠 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에고 선희아부지 정신 좀 차려봐요!"
쓰러진 남편을 흔들다가 이내 선희를 찾는다.
"선희야! 선희야! 얼른 윗집 슈퍼에 가서 꽃님이 아부지 좀 모시고 와! 어서!"
막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 남편은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그때 빨리 병원으로 갔더라면 그때보다는 나았을까. 수지침을 놓는 꽃님이 아부지를 부르느라 지금 흔히 텔레비전에서 떠드는 골든타임을 놓친 것일까. 선희아부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똥오줌도 누워서 해결해야 했다. 누워있는 아버지 수발을 막내와 둘째가 대신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대견하다. 하지만 그때 내 나이 마흔넷. 눈앞이 깜깜했다. 집도 변변치 못하고 애들은 셋에 남편은 반신불수다. 돈은 제대로 벌어다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신랑이 건재했을 때와 산송장처럼 누워있을 때는 하늘과 땅차이다. 너무나 무섭고 힘들었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럴 때 정사장 딸 수녕이처럼 의지할 엄마라도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하다 담배연기를 내뱉는다.
겨우겨우 집에 들어오니 현관에 수녀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게 보인다. 언제 왔는지 이미 거실과 안방은 걸레질이 되어 반질반질하다.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수녀님이 들어온다.
"아침부터 엄마 어디 갔다 와? 허리도 안 좋은 사람이"
"우리 수녀님 된장찌개 끓여 주려고 손두부 사러 갔다 왔지요.. 히히"
나는 손에 든 비닐봉다리를 흔들며 웃었다.
"두부 없어도 된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또 고집 피우신다. 난 그냥 된장으로만 끓여도 엄마가 해 주면 맛있다니까"
선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두부봉다리를 받아 쥐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한다.
"됐어. 된장찌개에는 두부가 들어가야지. 그래야 춘자春子표 된장찌개가 완성되는 거야. 근데 수녀님은 어디 갔다 와?"
두부와 다른 비닐봉지를 도마에 올려놓으며 선희가 말한다.
"우리 엄마하고 한잔 하려고 막걸리 사가지고 왔지. 호호"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수녀님은 막걸리를 사가지고 온 거다. 다른 사람의 눈보다는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물 잔으로 술대작만 해주는 우리 선희.
"엄마 된장찌개 얼른 끓여줘. 나도 후딱 먹고 가봐야 해. 어른 수녀님들이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토요일에도 제대로 나오기가 힘드네."
수녀님은 원래 있던 교구에서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천주교 사립학교의 선생님으로 발탁되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전에는 가끔이라도 올 수도 있었는데 지금 이사한 곳은 여러 명의 수녀님들과 같이 생활하고 모두 나이가 많아 마치 시어머니처럼 여러 가지로 참견이 잦은 것 같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사람을 섬기기를 바라는 그들의 모습에 괜스레 시집살이하는 딸이 안쓰럽고 얼굴도 보지 못한 나이 많은 수녀님들이 밉기까지 하다.
자 이제 시집살이하는 우리 며느리 수녀님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여 볼까.
재래된장은 채에 바쳐 풀고 멸치와 다시마로 먼저 물을 끓인다. 어느 정도 끓을 때 손두부를 깍두기보다 크게 썰어 넣고 다시 한번 한 소끔 끓어오를 때 대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 자 이쯤 되면 됐다. 불을 끄고 뚝배기에 담아내고 갓 지은 솥밥을 소복이 담아 상에 올린다. 뚝배기 속의 된장찌개가 '보글보글'거리며 식욕을 돋게 한다.
수녀님은 어려서부터 새물건을 살 줄 모르고 떨어지고 찢어지면 고쳐 입는 야무진 아이였다. 음식도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끓이는 된장찌개만 고집한다. 없는 살림에 자기 좋아하는 대로 먹고자 하면 엄마 주머니가 어찌 될 거라는 걸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힌 일찍 철든 큰딸이다. 열무김치와 계란찜이 밥상에 올라오면 선희가 제일 좋아하는 밥상이 완성된다. 여기에 수녀님이 사가지고 온 막걸리와 두 개의 잔이면 남부럽지 않다. 술은 내잔에만 따르고 수녀님 잔은 물을 따르지만 우리는 건배한다.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말한다.
"학교 수업하랴 시어머니들 모시랴 힘들지? 우리 수녀님."
선희는 다시 물 잔을 내 막걸리잔과 부딪히며 말한다.
"내가 편하려고 했으면 뭐 하러 수녀가 됐을까!
아이들한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고 어른수녀님 예수님처럼 바라보면 힘들 거 하나 없네..
오히려 감사해야지. 우리 엄마 딸내미 고생할 까봐 걱정하셨어요. 호호"
나는 막걸리를 마시려다 다시 뭔가가 욱하고 올라와 잔을 밥상에 내려놓으며 말을 잇는다.
"그렇지 뭐 전에는 토요일 나오는 거 이해해 주는 수녀님들이었는데, 그래서 하루 자고 가기도 했잖아.
근데 그리로 옮긴후에는 밥만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버리잖아.. 아쉽게두.."
나는 한글을 읽고 쓸 줄 몰랐었다. 몇 년 전 아주 늦은 나이에 동네 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어머니 한글교실을 다니고서야 겨우 까막눈을 면했다. 그렇게 익힌 한글로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 땐가 집안을 정리하다가 선희의 낡은 일기장을 언제 썼을지 모르는 분홍색표지의 일기장을 들춰 읽게 되었다.
띄엄띄엄
-뿌연 최. 루. 탄 연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동. 료 들의 기침과 소리치는 진압대원들의 고함소리.
그 와중에도 우리는 외친다.
노동인권을 보장하라!!
두들겨 맞고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우리는 외친다.
노동인권 보장하라!!
내가 이 노동운동을 왜 하고 있는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나는 아마도
외침 이후 그들과 마시는 이 시원한 막걸리가 좋아서일 것이다.
아니 그들 중에서도 그. 가 있기에
나는 더욱 크게 잔을 부딪힌다.
건. 배
하지만 그것은 나 혼자 떠드는 외침.
그들도 그도
나의 건배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것이 마지막
건. 배
나의 짧은 감정도
이것으로
-건. 배-
아마도 일기가 아니었더라면 아니 내가 까막눈을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내 딸이 우리 수녀님이 그때 왜 그리 방황했었는지 알지 못했을 거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나는 깜깜한 터널 속에서 앞만 보고 걷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