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루꽃

08. 오후-트로트 가수

by 책날 백대백

텔레비전에서는 트로트대전에 참가한 가수들의 인터뷰가 한창이다.

"참가번호 38번 왕민씨는 노래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하셨다고요?"

"네 저는 넌버벌 퍼포먼스 <하이퍼스>에서 피지컬트레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피지컬트레이너는 어떤 일인지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여자 진행자가 가지고 있던 질문지를 보면서 묻는다.

"넌버벌 퍼포먼스 <하이퍼스>는 여러 마샬아츠를 베이스로 하는 코미디공연입니다.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당연히 아크로바틱을 수개월에 걸쳐 연습하고 체력단련도 기본적으로 필요하죠. 저는 배우들의 몸 쓰기에 필요한 근육단련과 바른 동작을 하기 위한 트레이닝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연습 중이나 공연 중에 배우들은 항상 많은 부상에 노출되기 때문에 평소에는 기초체력과 자세를 훈련시키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뒤에서 공연 중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대기합니다."

왕민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화면에서는 무대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있는 배우들과 박장대소하는 관객의 모습이 나온다.

"아 그럼 프로스포츠팀의 팀닥터와 같은 거군요?"

"네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화면이 다시 영국 에든버러의 축제장면이 바뀌면서 여자 진행자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게다가 <하이퍼스팀>이라면 얼마 전 에든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 참가한 한국팀으로 <난타> 다음으로 유명해진 작품이죠?"

"예 맞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세계인의 호평을 받아 축제기간 내내 표가 쏠드아웃 sold out 됐었죠."

"그런데 왕민씨는 어떻게 트로트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

"작년 8월 에든버러 최대 극장인 어셈블리극장에서 황금시간대인 저녁 7시에 공연을 했었는데 공연 전 극장 앞 넓은 잔디밭에서 배우들 간 스트레칭 겸 간단한 근육마사지를 시행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노래를 부르고 그 리듬으로 배우들에게 운동을 하게 했는데 그때 주로 부르던 곡이 제가 만든 트로트곡이었어요."

"직접 곡을 만드셨다고요?"

짐짓 놀란 표정의 여자 진해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다.

"예. <하이퍼스>는 동양무술이 주를 이루는 공연이라 트로트리듬이 잘 어울렸거든요. 매일 잔디밭에서 여러 명의 배우들이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니 외국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신선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었나 봐요. 내 노래에 앙코르도 나오고 한마디로 본공연 전에 이것 또한 하나의 버스킹공연이 되었죠. 물론 우리 <하이퍼스> 공연의 홍보도 되었고요. 아마 그때였던 거 같아요. 노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만든 트로트를 부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요."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어느새 화면은 넓은 잔디밭에서 노래에 맞춰 배우들 각자가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과 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외국관객들이 화면을 채운다.


"새벽부터 밤까지 피었다 지는~꽃"

내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자 영란이가 다짜고짜 내 노래를 막는다.

"언니 지는~꽃을 더 간드러지게 뽑아야지. 잘 봐 지~는~꽃~~ 그 이름 하~루~꽃"

리모컨을 마이크 삼아 마치 가수가 된듯하게 영란이가 콧소리를 가득 넣어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왠지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도 영란이에게서도 계속 들었던 여파일 것이다. 인생이 하루처럼 쏜살같이 흘러왔다. 나이 팔십이면 이제 저녁도 훨씬 늦은 아니 밤이라고 해야 하나. 왠지 서글프다. 나는 하루꽃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가. 인생을 향기 나는 꽃으로 채웠던가. 누구는 햇볕 화창한 하루를 보낼 수도 하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나날을 보낼 수도 아니면 눈보라 치는 험한 날을 지낼 수도 있다. 우리 나이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격동의 세월을 견뎌왔다. 마치 사시사철 사계절 온갖 날씨들을 하루에 다 모아놓은 듯한 그런 하루를.


"영란아 아저씨는 어때?"

"어제 병원 가서 검사했는데 췌장암이래."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영란은 아무 표정 없이 말한다. 마치 방금 전 웃던 얼굴이 한 꺼풀 벗겨져버린 가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심하게 말을 잇는다.

"요즘 살도 빠지고 소화도 안된다고 그러더라고. 그이한테는 결과얘기도 못했어. 나도 당뇨로 이렇게 고생하는데 신랑도 죽을병에 걸리니 인생이 참 뭐 같네. 아이 언니 왜 그이 얘기를 꺼내고 그래. 그냥 이렇게 살다 가면 돼지. 인생 뭐 있어. 아파도 신나게 살면 누가 알아? 하늘에서 기특해서라도 병을 낫게 해 줄지. 병원 생각 말고 우리 왕민이 노래나 부르자고."

영란이 애써 웃으며 내 두 팔을 잡아 들고 춤추는 시늉을 한다.

"영란아 네 말이 맞다. 맨날 아프다. 아프다. 하면 더 아프더라. 네가 올라와 우스개 소리 하면 신기하게도 그날은 맨날 아프던 허리도 안 아프고 무릎도 쌩쌩해지는 거 같아.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