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이가 내려가고 다시 텅 빈 방안엔 텔레비전소리만 가득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창밖 건물사이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놀이터가 보인다. 어느 때부터인가 놀이터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삶의 무료함에 하릴없는 노인들의 술판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이라곤 나처럼 텔레비전 앞에 멍청히 앉아있던가 아니면 저렇게 모여 지나온 과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정도다.
저들이나 나나 자식들이 있지만 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자유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권리는 분명히 내 손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꼭 누가 하지 말라 안 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란 삶의 기준이랄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남의 행동을 너그러이 받아주라는
~딩딩딩~~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오 작은 딸"
"울 엄마 오늘은 좀 외로운가 보네. 찔통이라고 안 부르고 작은 딸이라고 간드러지게 부르는 거 보니 큭큭"
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급히 끄고 벽에 등을 기댄 채 핸드폰을 오른손으로 고쳐 잡는다.
"누가 우리 예쁜 딸을 찔통이라고 불러.땍! 그렇게 부르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히히.
일 끝났어? 많이 힘들었지?"
"엄마. 말도 마 새벽에 나가서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계속 일했다니까.
집이 어찌나 크던지 천장 도배하느라 목 꺾이는 줄 알았어. 그래도 우리니까 제시간에 딱딱 맞춰주고 게다가 깔끔하게 처리하는 거 아니겠어.. 큭큭."
"배고프지? 엄마집에 와서 밥 먹고 가."
"아냐 양서방하고 다은이하고 밥 먹어야지.
아니다. 그럼 엄마 부침개나 조금 해놔. 막걸리 한 병 사가지고 갈 테니까. 한잔만 하고 가지 뭐"
작은 딸은 집 근처에 살고 있다. 다은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고학년이 되었을 때 뒤늦게 도배일을 배워 일한 지가 벌써 오 년째다. 내 자식 셋 중에 우리 엄마를 닮아 얼굴도 예쁘장하고 손재주가 남다르다. 어릴 적에는 얼굴값 한다고 공부는 등한시하고 놀기에 바빠 지아버지한테 많이도 혼났다. 그래서 애들 아버지는 둘째를 찔통이라 불렀다. 아버지에게 혼나고 때로는 빗자루로 맞을 때 그나마 내가 방패막이가 돼준데 대한 뒤늦은 보답이려나. 둘째는 셋 중에 나를 제일 위한다. 그게 너무 고맙다. 물론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아서도 그러겠지만 일을 늦게까지 하고 몸도 지치고 집에 가서 신랑이랑 애도 챙겨야 하는데도 꼭 막걸리 사들고 우리 집에 잠깐이라도 온다. 혼자 있는 엄마, 하루종일 텔레비전 소리만 듣던 엄마 말동무를 해주려고..
"엄마 천장하고 벽 도배해야겠어. 집안에서 담배를 하도 피워대시니 벽지가 남아나지 않네.
아주 흰색이 누레졌어."
현관문을 들어서며 작은 딸이 말한다.
"히히히 담배는 내 유일한 취민데 뭐! 내가 다른 노인네들처럼 화투를 치길 하냐? 춤을 추러 다니길 하냐? 공원에서 술판을 벌이길 하냐? 힘들 때 한대 기쁠 때 한대 그런 거지 뭐. 그리고 내 집인데 집 안에서 피우면 좀 어떠니? 이런 것도 못할 바에야 혼자 사는 맛이 없지. 안 그래?"
"아유 알았어요. 누가 육십 년 골초인생 아니랄까 봐 담배예찬은 누구도 못 쫓아오지. 큭큭"
작은 딸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언가 결심한 듯 천장이며 벽을 다시 한번 휘익 둘러본다.
"그나저나 천장하고 벽을 실크로 해야 하나? 합지로 해야 하나?"
"실크는 뭐고 합지는 뭐야?"
나는 주방으로 나가면서 중얼거리듯 말하는 딸애의 말에 지나가듯 묻는다.
"실크는 코팅된 거라 오래 쓸 수 있는 건데 좀 비싸고 합지는 가격이 싸지만 여러 색 중에 고를 수 있는 거야. 엄마는 또 담배진이 베일 테니까 비싼 거 말고 싼 걸로 해 대신에 내가 예쁘고 화사한 걸로 해 줄게. 나 같은 도배전문가가 와서 하려면 따블 불러도 안 하지만 엄마니깐 특별히 도배지 값만 받지 뭐 큭큭큭."
나는 조금 전에 한 부침개를 올린 상을 들고 들어온다.
"도배지 값이 뭐야.. 너 다른 집 하다 남은 걸로 그냥 해줘.. 공짜로 히히히."
"농담이유.. 설마 내가 엄마한테 돈을 받을까?"
"그렇지? 공짜지? 히히히"
상위의 부침개를 젓가락으로 찢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나는 다은이에 대해 묻는다.
"다은이하고는 얘기 좀 하니? 어릴 때는 그렇게 싹싹하고 애교 많더니 중학교 가니까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어."
"하루종일 지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아. 허구한 날 음악만 듣고 밥 먹을 때만 얼굴코빼기 본다니까. 그것도 지 마음 내킬 때만. 이놈의 기집애 중2병은 자기만 걸렸다야. 완전히. 나쁜 기집애."
둘째는 갑자기 욱하고 무언가 올라왔는지 막걸리를 건배도 하지 않고 혼자 벌컥벌컥 들이켠다.
"학교는 왜 안 간다니? 머리채 끌고라도 학교 보내야지. 어디 학생이 학교를 안가. 학교를"
"엄마 요즘이 옛날하고 같은 줄 알아. 몸에 열 펄펄 나도 학교가야 만 하는 건 우리 때나 그랬지. 요즘엔 중학교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집에서도 엄마아빠들이 애들 눈치 보고 학교선생님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데요. 다은이 저러다 친구 보고파서라도 가겠지. 괜히 시한폭탄 안 건드리는 게 좋다고 다은이 아빠도 그러더라. 딱히 공부 잘 하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놀고 싶으면 놀라 하지 뭐. 내 인생이야 지 인생이지."
둘째는 내가 찢어 준 부침개를 입에 욱여넣고 자기 잔에 막걸리를 따르고 내게도 따라준다.
"그래 늬말이 맞다. 살아보니까 사람에게는 꼭 거쳐야 하는 때가 있는 거 같아. 제때에 겪을 일 겪어야지 건너뛰면 나중에 분명히 사달이 나더라. 너도 다은이 나이 때 내 속 많이 썩이고 가출도 하고 했잖아. 왜 기억 않나? 그날 니아부지한테 얼굴에 화장하고 학교 갔다고 엄청 혼나고 비 오는 데 집나 갔던 거. 한삼일 연락 없이 나가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가출하고 우리 반 영숙이네 가서 지냈던 거. 나중에 엄마가 영숙이네 찾아와서 아무 말 없이 나 안아줬었어. 엄마하고 나 한참 울다가 집에 들어갔었잖아. 그땐 아버지도 가만히 있더라. 신기하게도. 나는 다리몽댕이 남아나지 않겠구나 엄청 걱정하며 들어갔었는데."
둘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오른손등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살짝 훔친다.
"내가 니아부지한테 또 그렇게 너 혼내면 니아부지 다신 안 본다고 들어오면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아주 호되게 뭐라 해 놨거든."
우리는 다시 막걸리잔을 들고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그런 순간이 있어 너와 내가 이렇게 더 두터운 정이 쌓였나 보다.
그리고 나이 들어 너 같은 딸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고맙다. 둘째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