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셋 몸의 《면도날》을 읽고
자네 목표는 뭔가
바로 그게 문젭니다. 아직 목표를 모르겠어요.
소설 속 이 대화가 나를 멈춰 세웠다.
갑작스럽게 닥친, 원치 않던 퇴직 후 긴 터널에 갇혀있던 나에게 세상이 던지는 질문 같았기 때문이다.
공부, 취업, 결혼, 그리고 출산.
세상은 나에게 뒤처지지 않는 한국인으로 살기 위한 목표를 친절히 정해주었다.
나는 도장 깨기를 하듯 그 목표들을 하나씩 지워나갔고, 꽤나 잘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사회는 퇴직 이후의 목표까지 알려주는 친절은 베풀지 않았다.
등 떠밀리듯 멈춰 선 뒤에야 비로소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나의 목표는, 나의 꿈은 무엇인가?’
.
.
소설 속 사람들은 주인공 래리에게 묻는다.
“그런 것들은 배워서 뭐 하려고 그래?”
“지식을 얻는 거지.”
“현실적으로 별로 쓸모없는 것들 같은데.”
소설 속의 냉소는 한가로이 고전을 읽고 있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럴 시간에 헤드헌터와 연락하고, 구직 사이트를 뒤지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책장을 넘기는 나의 모습이 때로는 비겁한 현실 도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면도날》의 래리는 이 '쓸모없는 것들'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내던진다.
그에게 지식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다.
고전을 읽고 생각을 정리했던 지난 2년의 시간이 내게 삶의 특별한 해답을 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 기록들을 통해 나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가치관에 동의하며 반응하는가.
세상이 정해준 목표가 아닌 나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길.
그것이 면도날의 모서리를 걷는 것만큼 위태롭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제 기꺼이 그 길 위로 발을 내디뎌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