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 조야한 오만함을 벗고, 지혜로운 성숙으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

by thelitheaven



재독(再讀)은 가끔 따끔한 교훈이 되어 돌아온다.


처음 《오만과 편견》을 만났을 때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이하 리지)의

로맨스를 쫓기에 바빴다.

하지만 다시 펼친 책장에서 쾅 하고 가슴에 박힌 것은, 리지가 스스로를 ‘조야(粗野)하다’라고 몰아세우며

자책하던 대목이었다.


생존이라는 이름의 조급함, ‘한정상속’

19세기 영국은 재산이 오직 남성에게만 상속되는

이른바 ‘한정상속’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들이 없는 베넷가의 딸들과 어머니에게 결혼은

단순한 낭만이 아닌,

길거리에 나앉지 않기 위한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다.

리지는 비교적 냉철하고 이성적인 딸이었지만,

그런 그녀조차 위컴의 매너에 쉽게 매혹되었던 것은

어쩌면 이 생존 본능이 만든

조급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대를 빨리 판단하고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불안이 그녀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계급의 침묵 vs 화려한 언변: 리지 앞의 두 남자

리지 앞에 나타난 두 남자는 극명하게 달랐다.


다아시는 당시 영국 계급사회의 미덕인

‘절제’와 ‘함구’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였기에, 리지를 향한 고백은 자신의 명예와 계급적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은 처절한 각오의 산물이었다.


반면, 위컴은 타인에 대한 평가가

지극히 감정적이고 경솔했다.

하지만 리지는 다아시의 침묵을 ‘오만’으로,

위컴의 경솔함을 ‘다정함’으로 착각한다.

자신의 감수성이 얼마나 얄팍하고 조야했는지를 깨닫는 순간은 그렇게 뒤늦게 찾아왔다.


조야한 오만함을 넘어선 진짜 성숙

리지가 고백한 ‘조야함’이란 단순히 거칠다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타인의 인격을 깊이 들여다보기도 전에,

매너나 신분이라는 얄팍한 잣대로 상대를 재단해버린 ‘정제되지 못한 지성’에 대한 뼈아픈 자책이다.


리지는 스스로를 분별력 있는 지성인이라 믿었지만, 사실 그녀의 판단 기준은 위컴의 미소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날 것의 상태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편견을 확신이라 믿었던 자신의 감수성이 얼마나 조야했는지 인정하는 찰나,

그녀는 비로소 오만이라는 허물을 벗고 진짜 성숙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다.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

다아시는 흥분한 리지에게 말로 맞서지 않는다.

억울함이 넘쳤음에도 혈기를 부리는 대신, 예의를 갖춰 자리를 떠나고 다음 날 ‘편지’를 건넨다.

잘못에 대한 깔끔한 인정과 사실 위주의 담백한 서술.


그 편지를 읽는 장면은 리지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순간인 동시에, 나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혼자만의 확신으로 쉽게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내가 얼마나 조야할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진짜 지혜는 시작된다.

고전이라는 랜턴을 통해 오늘 나의 입술을 비춰본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은,

정제되고 세련된 지성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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