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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기 Oct 01. 2024

천상의 어머니를 위한 노래(최종화)


  겨울의 끝자락, 무림사 주변의 공기에는 돌길 가장자리에 달라붙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그런 냉기가 남아 있었다. 사찰은 구름이 많이 끼여 창백한 하늘을 배경으로 엄숙하게 서 있었고, 나무 기둥은 마치 고대의 비밀을 바람에 속삭이듯 조용히 삐걱거렸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옷을 입은 가연은 절 계단에 잠시 멈춰 서서, 산과 바다가 만나는 저 멀리 아른거리는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파도는 마치 그녀를 여행의 다음 단계로 부르는 것처럼 배경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그녀는 차가운 공기가 폐 안 가득히 채우는 것을 느꼈고, 그녀를 이곳에 인도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했다. 그녀의 강인한 정신과 신중한 선택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을 그녀 스스로 직접 개척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목표로 삼고 희망을 밝히며 미지의 세계에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가연은 점점 커지는 배 위에 부드러운 손을 얹고 그 안에 희미한 생명의 온기를 느꼈다. 그녀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위로이자 도전이었다.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고 새로운 현실의 무게를 느꼈다. 앞으로의 길은 불확실했고, 그녀가 아직 예측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이에 대한 생각은 그녀를 미래에 대한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녀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해 주었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약속을 존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 주변의 바람이 부드러워지자 그녀는 탁 트인 공간에서 고개 들어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고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산을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

부드럽게 바스락락거리눈 나뭇잎 소리는 두 팔을 벌려 흔들림 없는 용기로 이 새로운 장을 받아들이겠다는 그녀 자신과의 약속을 다짐하는 것 같았다.      

  가연은 모래사장에 서서 하늘과 바다를 향해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닿는 것 같았다. 파도가 잔잔히 밀려와 그녀의 발끝을 적셨고, 바닷물의 서늘한 감촉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눈을 감은 채 가연은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본다. 고운 눈매와 따스한 미소, 그리고 언제나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눈가가 촉촉해진 가연은 바다를 향해 속삭인다.

“엄마, 저 여기 왔어요.”

가연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파도 소리에 실려 사라졌다.

"지금은 엄마가 없는 이곳에서 혼자 서 있지만, 마음만은 엄마와 함께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계시던 이 고향 바다가, 그리고 이 바람이 엄마와 저를 이어주는 것 같아서요."

가연은 바다를 향해 손을 뻗어본다. 그녀의 손끝에 차가운 바닷바람이 닿아올 때, 마치 어머니의 손을 잡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매일매일 버티면서 엄마를 떠올렸어요. 엄마가 제 곁에 있는 것처럼… 힘들 때마다 당신이 곁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걸 감사드려요.”     

  눈을 감은 가연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리는 듯 느껴졌다. 그리움과 따스함이 온몸을 감싸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 엄마. 저 이제 아이를 가졌어요. 이 아이는 저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 같아요. 엄마처럼, 이 아이도 강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키우고 싶어요.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것처럼… 항상 힘이 되어주셨던 그 사랑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요.”

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배 속에서 작은 태동이 느껴졌다. 그 순간, 엄마의 손길이 아닌, 또 다른 사랑이 그녀의 안에서 새롭게 숨 쉬는 느낌이었다. 가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 당신이 저를 그렇게 애쓰며 키우셨던 이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저를 더 강하게, 삶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던 거죠? 당신의 노력과 사랑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서서 감사할 수 있는 제가 있는 것도 다 엄마 덕분이에요.”

  가연은 눈물을 닦으며 다시 한번 바다를 바라보았다. 깊고 푸른 바다는 마치 어머니의 눈처럼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가연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큰절을 했다.

“엄마, 이제 저 태주를 만나 결혼하기로 했어요. 그 사람은 제가 힘들 때도 지켜주고 잊지 않게 해 줘요.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엄마도 제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기뻐하시겠죠?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게요. 그러니 하늘에서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바닷바람이 한층 부드럽게 가연을 감쌌다. 그녀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어머니를 떠올리며 가슴 깊이 스며드는 따뜻함을 느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는 가연의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멜로디는 마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처럼 가연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웃고 뛰어놀았던 바닷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고요히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계에 바빠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저 파도만이 옛 기억을 머금은 채 그녀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지자, 가연은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엄마를 위한 노래를 부를게요. 당신을 그리며, 또 사랑하며…”     


엄마를 위한 노래


바람아 불어라 나를 데려가 주오

구름아 흘러라 엄마 계신 곳으로

바람 타고 날아가 구름 따라 스치면

엄마의 손길 닿을까 눈물로 부르네


바람아 속삭여 나의 그리움 전해

구름아 안아줘 엄마의 품처럼

바람 타고 구름 따라 살아온 세월도

엄마의 사랑 속에서 따스히 머물러


바람아 불어라 나를 데려가 주오

구름아 흘러라 엄마 계신 곳으로

하늘 너머 어딘가 엄마의 미소처럼

바람에 실려 닿기를 소망하며 부르네


  노래를 마친 뒤, 가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 위로 부드럽게 떠다니는 구름들이 마치 어머니가 저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바람이 불어와 가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 바람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억이 그 바람을 통해 가연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저 여기 잘 있어요. 마치 바람처럼 홀연히 떠나시다니… 당신이 너무 그리웠어요.”

  어머니의 그리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그녀의 발아래 고요히 펼쳐진 백사장이 그녀의 작은 발자국으로 아로새겨졌다. 파도가 조용히 밀려와 그녀의 발등을 적셨고, 그 부드러운 감촉은 마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인사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머리 위로 갈매기들이 선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마저도 어머니의 웃음소리처럼 다가왔다. 가연은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 제 마음속에 당신은 항상 계세요.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 당신의 바람 같은 사랑이 제 곁에 머물러 주길 바래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파도 소리와 함께 한 발짝,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은 더욱 푸르게 빛나고, 바다는 끝없이 그녀를 품어 주고 있었다. 가연은 하늘과 바다를 잇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곳이죠? 해당화가 피어난 해안가에서 걷고 있어요. 바람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실어 연인들의 웃음 사이로 흩어지는 것만 같아요.”

  가연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짭짤한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그녀의 코끝을 스쳐갔다. 어머니의 기억을 담은 바람 속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했던 따뜻한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힘들게 사셨죠, 어머니. 당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가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깊고 잔잔한 숨결 속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바람에 실려 가연에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너는 잘하고 있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고맙구나.”

가연은 속삭이듯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바다처럼 깊어서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때때로 너무 힘들어서, 잠시 당신을 잊은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엔 언제나 어머니가 계셨어요.”

  그녀의 말이 파도 소리에 실려 하늘과 바다로 퍼져나갔다. 가연은 고개를 들어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이제는 아픔도 고난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도 편히 쉬세요. 제가 어머니 몫까지 잘 살아갈게요. 그리고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면, 그땐 저도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하늘은 변함없이 잔잔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넨 가연은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따스함을 느끼며, 하늘과 바다의 품 안에서 다시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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