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병원과 제일그룹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대규모 바이오메디칼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각자 집안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상호 협력으로 더 큰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 프로젝트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정략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결혼은 병원과 그룹의 협력관계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미래의 안정성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태주와 가연 사이의 일이 드러나며,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그룹 회장의 부인인 최원심은 고급스러운 비단 한복을 차려입고 나라병원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의 대리석 테이블과 반짝이는 조명이 현대적이며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박 원장은 그녀의 방문을 눈치채고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했지만, 최원심의 차가운 눈빛은 이미 결정된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박원장, 이번 정략결혼은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을 것 같아.”
원심은 냉정하게 입을 뗐다. 박 원장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긴장과 분노에 차서 땀이 맺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모든 게 그 가연이라는 여자 때문이 아닙니까? 그 여자가 태주를 유혹해서 이 모든 사단이 난 겁니다! 나쁜 년!"
박 원장의 격렬한 비난은 회의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최원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분한 어조로 대응했다.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이 박 원장을 바라보았다.
"가연은 내 아들의 아이를 가진 사람이야. 곧 태어날 아이는 내 손주가 될 아이인데. 박 원장, 앞으로 그런 말을 삼가해 주셨으면 좋겠어. 그녀는 내 며느리가 될 사람이니…."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신뢰는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박 원장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원심은 그의 얼굴에서 붉어진 분노와 실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더 이어가며 회의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 했다.
"바이오메디칼 프로젝트는 여전히 중요한 사업으로 그대로 진행될 거야. 회장님 한데 잘 부탁드려 놓을게 그 부분은 걱정 마, 우리는 이 일로 관계를 포기할 수는 없겠어."
박 원장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올랐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남편 장한국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여보, 지금 당장 집으로 와요. 더는 못 참겠어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장한국은 한창 연구실에서 중요한 실험을 진행 중이었으나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깊이 패인 주름진 얼굴을 찡그리며 실험 도구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급하게 부를 일이 있어요?"
박 원장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가연이 그 여자가, 태주와 아이를 가졌대요. 최 회장 부인께 직접 들었어요. 지금 나라병원의 명예가 다 걸린 일이에요. 이 결혼은 이제 완전히 무산될 위기입니다!"
장한국은 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내의 불안과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더 깊이 분석하고 있었다.
"알겠소. 지금 바로 집으로 갈 테니, 조금만 진정하고 기다리시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차분했지만, 그 역시 이번 일이 나라병원과 제일그룹의 미래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장한국은 앞으로의 대응책을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한국은 사무실의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있었다. 그의 손은 피곤에 지친 듯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벽에는 나라병원의 성공을 상징하는 사진들과 상패들이 걸려 있었지만, 그 찬란함은 그가 느끼는 깊은 죄책감과 불안감을 덮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서류 더미에 흐릿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차가운 공기가 어두운 방을 채우며 그의 긴장된 숨소리를 무겁게 만들었다.
‘가연만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그가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마치 그 소리마저 그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아침의 빛이 부드럽게 도로를 감쌌다. 병원 근처의 교차로는 한낮이 다가옴에 따라 점점 붐비기 시작했고, 가연은 하얀 간호사복을 입고 병원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얼굴을 감쌌고, 작은 미소가 얼굴에 맺혔다. 갑자기, 멀리서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리며 가속되었고, 그 소리는 빠르게 다가왔다. 가연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차가 눈앞에 위협적으로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연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지만, 도로에 구르고 난 후 복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한 노인이 외쳤다.
“괜찮아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가연은 검사대에 누워 숨을 고르며 손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았다.
“아기는 무사해요, 가연 씨.”
의사의 말에 그녀는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에는 불안과 의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분명 그날 아침의 사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직감은 옳았다.
며칠 후, 장한국의 사무실에 가연이 들어섰다. 그곳은 차가운 철제 책상과 거대한 책장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오후의 햇살이 무겁고 긴장된 공기를 더했다. 장한국은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번졌다.
“박사님, 그날 아침 사고, 당신이 한 짓이었죠?”
가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결연했다. 장한국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멀리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메마르고 떨렸다.
“병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아이는 태어나선 안 돼.”
가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장한국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병원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저에게는 이 아이가 전부예요. 그리고 그 아이는 태주와 제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죠. 그런데 당신이 아버지일 수도 있단 사실을 아시나요?”
장한국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은 책상 모서리를 강하게 붙들었고, 숨이 거칠어졌다.
“아버지라니… 무슨 소리야?”
가연은 서류 봉투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여기 유전자 검사 결과가 있어요. 당신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을 증명하는 서류입니다.”
장한국은 서류를 바라보며 말문이 막혔다. 손이 떨리며 종이를 잡은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 당시 너희 엄마와는… 우리가 사랑이라기보다 한 순간의 실수였어. 하지만 그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아.”
장한국은 변명처럼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가연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어떤 결정을 했든 간에, 아버지로서 책임을 외면한 건 사실이에요. 저를 죽이고 싶으셨겠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예요. 태주와의 결혼을 도와주세요. 그럼 저도 나라병원과 제일그룹의 추진 중인 바이오 사업에 협력할 의향이 있어요.”
장한국은 가연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그녀의 말속에 숨어 있던 진실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너… 네가 그걸 알았구나. 언제부터?"
"오래전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당신이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거죠."
장한국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며 가연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단호함이 그를 묶어두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보마.”
그리고 가연은 자리를 일어서 나왔다.
“나라병원이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외딴섬 의료 봉사는 병원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중요한 기회입니다.”
박영심 병원장은 대한과 가연에게 의료봉사를 다녀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불안과 결단이 엿보였다.
“알겠습니다, 병원장님. 준비하여 다녀오겠습니다,”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답했다. 옆에 서 있던 가연은 마음 깊은 곳에 일렁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떠나기 전날 밤, 태주는 가연과 마주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연아, 정말 괜찮겠어? 너의 상태가…”
가연은 태주의 말을 끊으며 미소를 지었다.
“태주야, 걱정 마. 나도 내 몸 상태 잘 알고 있어. 잘 다녀올게.”
그녀는 그가 안심하길 바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대한과 가연은 의료진의 일원으로 외딴섬으로 떠났다. 현지에는 의료 시설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질병과 가난에 지쳐 있었다.
“가연 씨, 이 환자부터 보겠습니다.”
대한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 대한씨 같이 해요.”
가연은 환자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대한과 협력해 진료를 이어갔다. 하지만 가연은 대한의 다정한 시선과 말에도 철저히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는 태주와의 미래와 복잡한 감정이 마음을 짓눌렀다.
일주일간의 의료 봉사가 끝나고 돌아온 후, 병원에는 갑작스러운 비상사태가 닥쳐왔다.
“감염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모든 의료진은 즉시 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긴급 방송이 울려 퍼지자, 병원은 순식간에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가연과 대한은 환자들 사이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감염자들을 돌봤다.
어느 날 밤, 대한은 가연에게 다가왔다.
“가연 씨, 여기서 조심해야 해요. 당신까지 위험해질 순 없어요.”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대한 씨. 우리 모두가 함께 버텨야 해요. 대한 씨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날 저녁, 대한은 한 환자의 상태를 살피다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었다.
“대한 씨, 괜찮으세요?”
가연은 그가 점점 창백해지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한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가연 씨. 저보다 환자들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그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끝내 그는 병상에 누워야 했다.
“가연 씨…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하지만 내가 없어도 당신은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대한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가연은 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대한 씨, 당신의 용기와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갈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슬픔과 결심으로 가득 찼다.
대한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고, 그의 손은 서서히 차가워졌다. 가연은 그 순간 그의 희생과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병원의 다른 의료진은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도 한가롭게 슬퍼할 틈이 없었다.
며칠 뒤, 병원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갔지만 어딘가 공허했다. 박영심과 장한국은 아들의 빈자리를 느끼며 슬픔에 잠겼지만, 그들은 병원장으로서 의연하게 병원의 일상을 지켰다.
“대한이 우리에게 남긴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영심은 직원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가연은 병원의 분주한 흐름 속에서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새겨진 대한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결심했다. 이제는 타인의 기대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리라. 백운 선사의 가르침이 그녀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병원은 다시 고요 속에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연은 작은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창가에는 노란 단풍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지고 있었고, 방 안은 조용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차가운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자신에게 닥쳐온 현실을 되새겼다. 임신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실 앞에서 그녀는 태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슴 한편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태주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따뜻한 미소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 서로의 꿈을 나누던 대화, 그리고 서로를 향한 설렘과 기대.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태주의 아이를 가지게 된 현실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연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피곤한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이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태주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의 반응은 어떨까?’
그녀는 태주의 막강한 재력과 사회적 배경에 얽매여 자신의 선택을 흐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결혼은 단순히 책임감 때문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철학은 단호했다.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서로의 꿈과 가치관을 존중하며 함께 인생을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태주에게 의지해서 결혼을 밀어붙이고 싶지 않아.”
가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결심을 다졌다. 그녀는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주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결혼이라는 결말이 그녀의 미래일지라도, 그저 책임감 때문에 맺어진 관계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 안의 고요 속에서, 가연은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녀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은 그녀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는 무엇이 최선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방 안을 울렸다. 마음속에서 두 가지의 갈등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현실은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주와의 결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가연은 아직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태주 역시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태주가 가진 부와 명성, 그리고 그가 속한 세계는 가연에게 낯선 곳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연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과연 나의 고집이 옳은가? 아니면 새로운 가족을 위해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그녀의 눈은 창밖의 떨어지는 낙엽을 좇았다. 마치 자연의 순리처럼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가연은 결국 백운 선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가을의 정취가 짙게 깔린 산길은 조용했고, 붉게 물든 단풍잎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스치며 자연의 고요함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걷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소용돌이쳤다. 여러 가지 복잡한 걱정과 불안이 한데 얽혀 그녀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선방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가연은 잠시 멈추어 심호흡을 했다. 작은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자, 향의 은은한 냄새가 가연을 맞이했다. 내부는 담담한 조명 아래 따뜻한 나무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빛났고, 벽에는 오래된 경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백운 선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그 고요한 공간의 중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산의 정수와도 같았다.
가연은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한 후, 눈을 들어 선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깊고 잔잔한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마침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사님, 저는 태주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결혼이 저와 그에게 옳은 선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저 혼자서 이 아이를 키울 자신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백운 선사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가며 조용한 미소가 번졌다. 한참 후, 차분한 목소리가 선방 안에 울렸다.
“결혼은 단순한 책임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함께 나누는 약속이다. 사랑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다.”
그의 말은 천천히 울려 퍼지며 가연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선사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덧붙였다.
“네가 느끼는 부담을 충분히 이해한다. 부모로서의 책임은 무겁지만, 그 아이는 너와 태주가 함께 나누어야 할 소중한 인연이다. 이 인연은 단순히 너희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의 삶 전체와 연결된 것이다.”
가연은 선사의 말이 자신의 깊은 고민을 꿰뚫어 본 듯해 놀랐고, 동시에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이란 사랑과 책임을 넘어서는, 함께 인생의 기쁨과 고난을 나누는 동반자 관계라는 것이 선사의 말속에 담겨 있었다. 백운 선사는 깊은 생각에 빠진 가연을 지켜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리고 너의 고민은 아이뿐만이 아니지 않니?”
가연은 순간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는 제일그룹과 나라병원이 추진 중인 바이오메디칼 공동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이 프로젝트는 그녀와 태주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성공한다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혁신적인 연구였다.
백운 선사는 가연의 생각을 읽은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네 아버지, 장한국 박사와 나라병원, 그리고 태주가 속한 제일그룹은 이미 인연으로 깊이 엮여 있단다. 이 인연을 잘 풀어낸다면, 너와 태주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큰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인연이 그 길을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떻게 그 인연을 받아들이고 가꾸어 나가는지에 달렸다.”
가연은 선사의 말이 주는 무게를 마음속에서 되새기며, 결혼과 아이, 그리고 자신이 맡은 사명이 서로 얽힌 운명의 실타래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 길이 쉽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자신과 태주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희미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백운 선사가 앉아 있던 곳은 고즈넉한 무림사의 법당, 낮은 햇살이 어스름히 들어와 벽면의 오래된 불화에 신비로운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법당 내부는 나무의 잔향이 은은히 퍼져 있었고, 바람이 스며들어 바닥의 기왓장을 스칠 때마다 잔잔한 소리로 응답했다. 선사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지며 지혜로운 주름이 일렁였다. 그의 눈빛은 물살처럼 부드럽지만 그 깊이는 바다 같았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밥그릇이 있다. 그 밥그릇의 크기와 모양은 운명에 의해 정해진다.”
백운 선사의 목소리는 낮고도 평온하여 가연의 심장을 두드리는 듯했다.
“그 밥그릇을 그냥 따르느냐, 아니면 그 위에 더 큰 공덕을 쌓아 가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상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상수를 넘어서는 변수를 만들 수 있다.”
가연은 한순간 숨을 멈춘 듯 선사의 말을 새기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선사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가연의 내면을 꿰뚫고 있었다. 법당 밖에서는 새소리가 은은히 퍼지며 나뭇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백운 선사의 말은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마치 오랜 시간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는 것처럼 가연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었다.
“결혼 또한 하나의 운명이지만, 그 안에서도 변수를 만들 수 있다. 네가 태주와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네 노력에 달려 있다. 타고난 밥그릇이 작다고 그 인연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 밥그릇을 채우는 것은 너의 선택인 것이다.”
백운 선사는 마지막 말을 끝맺으며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따뜻한 차향이 가연의 코끝을 감싸며 잔잔한 안정감을 더했다.
법당을 나선 가연은 참나무 숲길을 따라 무림사의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계단 끝에 다다를 즈음, 그녀는 산 아래 펼쳐진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와지붕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사이사이 들판은 녹색 물결로 넘실댔다. 하늘은 저물어가며 노을빛을 물들여 가연의 마음속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가연은 선사의 말을 곱씹으며 발길을 옮겼다. 타고난 밥그릇이라는 상징은 그녀의 운명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희생과 태주의 헌신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혼이 단순한 사랑의 서약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며 가연은 결심을 굳혔다.
퇴근 후,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병원 근무를 마친 뒤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란 조명 아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창문 바깥의 밤하늘은 별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가연은 책상 위에 펼친 의학 서적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의대에 진학하는 길이 험난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태주와 함께할 미래를 위해 매일 조금씩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차분히 책장을 넘기던 가연은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백운 선사의 말처럼, 인생은 주어진 운명 속에서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녀의 손끝에 닿는 페이지마다 새로운 다짐이 새겨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