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는 창문을 통해 부드럽게 흘러들어오는 저녁 햇살과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벽에는 세련된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공간을 채우며 손님들의 속삭임을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태주는 손에 든 커피잔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가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연은 얇은 흰색 블라우스와 짙은 회색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살짝 웅크린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을 느끼는 듯했다.
가연의 표정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눈동자에는 말 못 할 갈등과 복잡함이 비쳤고, 그녀의 어색한 미소는 태주의 가슴을 더욱 저리게 했다. 그 미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분해 보일지 몰랐지만, 태주에게는 그녀의 감정의 갈피를 잡으려는 애처로운 시도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심장이 마구 뛰었고, 이 여인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태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가연아, 지난번 우리 집에서의 가족 모임이 조금 어색했던 건 아니었나?"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가 느끼는 진심 어린 걱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건넸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가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잔을 천천히 돌리다가 대답했다.
"괜찮아, 태주야. 그런 자리는 익숙해졌어."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조용했으며, 그 속에는 자신을 억제하려는 듯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태주야 어머니께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담긴 무거운 슬픔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 말을 들은 태주는 마음이 아파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의 눈빛, 가연을 바라보던 냉랭한 태도와 시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을 되새기며 가연에게 약속했다.
"어머니는 아직 가연을 잘 모르셔서 그러신 거야.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실 거야. 내가 시간을 두고 잘 말씀드려 볼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감싸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가연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가연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풀리지 않는 긴장과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태주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려 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태주야,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모든 걸 당신에게 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두 눈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태주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의 손끝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가연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기다릴 거야.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태주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말은 작은 위안이 되었지만, 가연의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성과 사랑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녀는 태주의 사랑이 자신이 가진 깊은 상처를 모두 치유해 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를 지켜보았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카페의 조명은 점차 어두워졌고,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밖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시간을 견뎠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가연의 목소리 끄트머리가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절박함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의 두 손은 무릎 위에서 꼭 맞잡힌 채, 심장 소리를 숨기려는 듯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무렵, 집안의 거실 한쪽에서는 원심과 박 원장이 태주의 결혼 문제를 서둘러 논의하고 있었다. 이 넓고 고풍스러운 거실은 옛 조각 장식과 비싼 도자기로 꾸며져 있었으며,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울렸다. 박 원장은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핸드폰을 들어 목소리를 낮추어 통화했다.
"우리 딸 나라와 태주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태주는 제일그룹의 후계자니까, 나라와의 혼인은 서로에게 커다란 기회가 될 겁니다."
박 원장의 말은 마치 오래 준비해 온 각본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입꼬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눈빛에는 결단력이 담겨 있었다.
원심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동의의 표시를 보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 반 기대 반의 감정이 얽혀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이 섞인 그녀의 머리카락이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반짝였다.
"맞아, 박 원장. 우리 아들도 이제는 혼기를 놓칠 나이가 아니지. 나라와의 인연이 잘 맺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야. 태주에게도 좋은 짝이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러한 대화들이 오가는 동안, 태주의 마음은 고요한 파도처럼 멀리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그의 생각은 가연의 모습과 부드럽게 맞닿아 있었다. 그녀의 미소, 손끝의 따스함,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작은 대화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 시간, 원심은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어두운 원목 식탁 위에는 각종 요리와 은은한 촛불이 빛을 내며 분위기를 더했다.
"태주야, 나라와 결혼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식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주에게 쏠렸다.
태주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어릴 때부터 여동생처럼 지내온 나라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조여 오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결심한 듯 눈을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사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의 긴장과 결심이 섞여 있었다. 원심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조용히 식탁 위에 내려놓고 아들을 주시했다.
"뭔가 중요한 얘기니, 태주야?"
그녀는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촛불의 불빛이 그녀의 표정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버지 역시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들의 말을 기다렸다. 태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의 시선은 흔들렸지만 마음속 결심은 확고했다.
"나라라는 사람은 저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껴 마지않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은 생기지 않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아요. 억지로 결혼을 한다는 건 제게 너무 힘든 일일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원심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곳에서 흔들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없이 태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아버지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네 마음은 이미 확고한 거로구나?"
그의 말은 깊이 울려 퍼지며 방 안을 채웠다.
"네, 아버지. 제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태주는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하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 순간, 긴장감이 물결처럼 방 안을 휘감았다. 부모님은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며 작은 불빛이 비치는 거실에 앉아 이번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벽에는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따뜻한 기운을 내뿜으며 걸려 있었고, 창밖에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원심은 깊은 주름이 새겨진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죠? 박 원장은 이미 나라와 태주가 곧 결혼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실 텐데….”
원심의 말은 방 안에 무거운 공기를 드리웠다. 태주 아버지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스며 있었다.
“결혼은 결국 당사자가 서로의 마음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강제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날 밤, 태주는 자신의 방 안에 홀로 앉아 침묵에 잠겼다. 방 안의 전등은 은은한 노란빛을 뿜으며 그의 생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태주는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사진 앨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가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로 인한 혼란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단호한 반대와 주변에서 쏟아지는 기대들 사이에서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란 속에서도 그는 가연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태주의 어머니는 나라 병원에서 박 원장을 만나 이번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따뜻한 햇빛이 병원 창문을 통해 들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태주의 마음을 전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태주가요, 나라를 여동생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하는군. 나도 솔직히 이 일로 마음이 복잡하군.”
박 원장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잔잔한 얼굴에는 오랜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서로 부담 없이 만나면서 시간을 두고 친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변화할 수 있어요.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이 되어 나라가 피곤한 기색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녀는 긴 하루를 보낸 탓에 얼굴이 살짝 지쳐 보였지만 눈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나라가 서둘러 물었다.
“엄마, 혹시 태주 어머니를 만나셨나요?”
엄마는 차마 쉽게 말하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만났어. 태주가 네게 여동생처럼 느낀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당장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단다.”
나라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의 입술은 살짝 떨리며 억누른 감정을 내비쳤다.
“내가 여동생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엄마는 딸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나라야, 너도 한 번 적극적으로 태주에게 다가가 보렴. 예를 들어, 함께 저녁 식사도 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마냥 어린아이로 보이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고 여자로서 태주에게 네 진심을 보여줄 때가 왔어.”
나라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며들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게 엄마 말처럼 쉬울까요?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이 흘러 나라와 태주는 예전보다 더 자주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아 만났다. 푸른 공원이 펼쳐진 산책로에서, 붉은 노을이 물든 강가 카페에서 두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태주는 여전히 나라를 친동생처럼만 대했다.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거리감에 나라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데이트는 단조로웠고, 나라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느꼈다.
병원은 약간의 긴장감과 따뜻함이 섞인 공간이었다. 흰색 벽과 반짝이는 바닥, 무거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너머로 겨울 햇살이 엷게 스며들었다. 가연은 환자들의 차트를 정리하며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밝은 미소와 다정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이따금씩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주의 발걸음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근 들어 태주는 점점 더 자주 병원을 찾아왔다. 그의 방문은 가연에게 은근한 기대와 따뜻한 안도감을 주곤 했다. 그 순간, 병원장의 아들 대한이 복도를 지나가다 태주를 보고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태주야, 병원에 무슨 일로 온 거야?”
대한의 목소리는 밝고 친근했지만, 눈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태주는 약간 당황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 원무부에 볼일이 좀 있어서 왔어.”
그는 시선을 잠시 피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대한은 특유의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됐네. 나도 여동생 나라랑 저녁 먹으려고 했거든. 같이 갈래?”
그의 말에는 호의가 가득했지만, 태주는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안해, 오늘은 어머니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하자.”
그리고 태주는 약간 급한 걸음으로 병원을 나갔으며 그의 모습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거지?!'
대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태주는 병원을 나와 어두워진 거리를 걸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가끔 일이 끝난 후에도 병원 근처를 서성이며 가연을 생각하곤 했다. 가연은 최근 임신으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태주는 그런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어느 늦은 저녁, 두 사람은 바닷가의 고요한 방파제에 앉아있었다.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려오고,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들의 주위는 한산했고, 오직 바닷바람이 긴 머리를 살며시 휘날렸다. 가연은 얼굴이 약간 창백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요즘 입덧이 심해져서 힘들어.”
가연이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태주의 눈빛은 걱정과 따스함으로 변했다. 그는 즉시 가연을 위로하며 근처의 작은 식당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 식당은 아늑한 분위기였고, 신선한 해산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주문한 물회가 나오자마자, 가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입덧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태주는 깜짝 놀라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가연아, 괜찮아? 너무 힘들면 먹지 말고 그냥 쉬어.”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안정감을 주었다. 가연은 힘들어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가에 힘겨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괜찮아. 그런데 어쩌지?”
그 말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태주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진지한 얼굴로 가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부모님께 말씀드릴게. 더는 걱정하지 말아.”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 말은 그의 진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가연은 그 말에 순간적으로 놀란 듯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는 의심과 염려가 번졌다.
“태주야, 혹시 너무 부담스러우면 지금이라도 말해도 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태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아이잖아. 이건 책임감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야.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말아.”
그의 말에 가연은 마침내 그의 진심을 온전히 이해한 듯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태주의 다정한 목소리와 진지한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들은 그날 밤, 별빛 아래에서 조용히 손을 맞잡고 앉아 있었다.
태주는 회사로 돌아왔지만 차분히 서류를 보거나 회의에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쉰 후에도 마음속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연과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하늘도 그의 우울한 심정을 비추는 듯했다.
결국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에 태주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저녁을 함께하자고 청했다. 그날 저녁, 태주는 어머니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도심의 아늑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일식집 장식과 조명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머니는 이미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태주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분히 놓인 젓가락과 따뜻한 녹차 한 잔이 그들을 반겼다.
태주는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진지했다.
어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저녁을 먹으니 참 좋구나.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진지하니?"
태주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머릿속의 혼란을 정리하려 애쓰며 말했다.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래, 누군데? 내가 아는 아가씨인가?"
태주는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어머니도 잘 아시는 아가씨예요. 예전에 어머니가 뺑소니 사고를 당했을 때 도움을 주셨던 한가연이에요. 저와 가연이는 교제 중입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놀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가연이? 어떻게 그렇게 됐니?"
태주는 한숨을 내쉬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사실, 가연이 임신 중이에요. 이제 4주 차에 접어들었어요."
어머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태주의 말을 되새기는 듯 멍하니 있었다. 식당의 잔잔한 음악 소리와 조용히 물 잔을 마주치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된 정적을 더욱 강조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책임질 일이면 져야 한다. 아버지께는 내가 먼저 이야기할게. 네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어머니의 말에 태주는 목 안의 단단한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냈고,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의 떨림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가연은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태주.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니 정말 감사해."
며칠 후, 태주의 아버지는 아내에게서 소식을 듣고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평소에 굳은 성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이가 이런 큰 결정을 했구나. 결혼 날짜부터 잡아야겠군."
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몰라."
어머니는 창밖으로 비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 순간 집안은 새로운 변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늦은 밤이었다. 조용한 바닷가는 검푸른 파도가 부딪쳐 하얗게 물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가연과 태주는 이 밤의 고요함 속에서, 방파제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고, 달빛은 그들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뚜렷하게 펼쳐져 있었고, 별빛은 반짝이며 어두운 바다 위를 점처럼 수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아름다운 장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잔잔하지 않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태주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기 전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가연아, 우리 마음이 이렇게 깊어지는데도 때로는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가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밝기보다는 서글픈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갔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
그녀가 낮게 말하며 조용히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에게 사랑의 피에로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와 섞여 들리며, 멀리서 파도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가연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천천히 이어 말했다.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고, 떠날 용기도 없고, 서로를 위해 슬픈 표정을 짓는 피에로 같은… 그런 모습으로."
그녀의 말은 태주의 가슴 깊은 곳에 닿았다. 그는 그동안 자신들이 서로에게 감정의 장막을 두르고 그 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태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말 그 사랑의 게임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목소리에는 자조 섞인 회의감이 묻어 있었다.
가연은 그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시선은 달빛에 빛나는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난 이 사랑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복잡해도…."
태주는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결심이 강해졌다. 가연을 지켜보며 그는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졌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그녀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사랑의 무대에서 피에로가 될지언정 끝까지 함께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의 마음은 뜨겁고 강렬했지만, 가연과의 관계는 마치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태주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연은 그 따뜻한 손길을 느꼈지만, 자신이 여전히 그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슬픔 속에 갇혀 다른 사람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은 저녁을 함께한 후, 바닷가에서 벗어나 근처 공원의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늘엔 아직도 별이 가득했고, 주변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러운 속삭임을 흘렸다. 태주는 그 속삭임을 뚫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연아, 어머니께서 우리를 이해하시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야."
가연은 그 말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어딘가 공허했다.
"나도 알아, "
그녀가 작게 답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관계가 이대로는… 많이 힘들어."
태주는 그 말을 들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마음에는 그녀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내가 당신 옆에 있을 테니까."
가연은 그 말에 안도감을 느끼려 했지만, 자신의 불안과 복잡한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랑의 미로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완전히 닿지 못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