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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기 Sep 25. 2024

사랑의 신비

  가연은 산사를 떠나 내려오는 길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산길을 걸으며,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홀로 섬에서 지내고 있는 아버지는 지금 어떤 심정이실까? 술에 의지해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다고 했는데, 그 고독 속에서 더 아프시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생물학적 아버지, 장한국 박사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그녀를 짓눌렀다. 낳아주신 아버지지만, 이제 와서 그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고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와 장한국 박사를 지켜보며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 더 나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섣부른 행동보다는 차분하게 기회를 기다리며 올바른 타이밍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불행이 그녀를 찾아왔다. 섬에 홀로 계시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의지해 지내시던 아버지는 결국 기력이 쇠해졌고, 이웃 주민의 도움으로 급히 병원에 실려 가신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가연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엄마를 떠나보낸 지 채 49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접하니, 그녀는 견디기 힘든 절망에 빠져들었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리도 가혹하십니까…“

가연은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은 깊은 외로움과 무력감 속에서 신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만 이런 시련이 반복되는지, 왜 운명은 이렇게까지 잔인한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조차 희미해진 그 순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태주였다.

그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가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가연, 괜찮아? 여기 혼자 있을 줄은 몰랐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과 배려가 담겨 있었다. 가연은 그를 보자마자 쌓였던 감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버텨왔던 마음의 이 허물어지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태주는 가연이 말할 새도 없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가연아, 괜찮아. 무슨 일 있든지 같이 해결해 나가면 돼.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고... 나도 네 곁에 있을게.”

태주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가연’, ‘태주’로만 부르며 친구처럼 솔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둘 사이의 유대감이 한층 깊어졌고, 그들은 마치 오랜 벗처럼 서로의 곁에 서 있었다.

태주는 가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같이 가자. 아버지 병원까지 차로 같이 가줄게. 아무리 힘들어도, 네 옆에 내가 있어. 힘내자.”

그는 손을 꼭 잡아주며, 마치 그녀가 어떤 아픔도 잊을 수 있게 하려는 듯 강한 믿음을 전해주었다. 가연은 태주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태주는 가연의 손을 잡아 주며 아버지가 계신 병원까지 자신의 차로 함께 동행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차에 올라탄 가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천천히 아버지의 병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마주한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는 가연을 보자마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좋은 일 하려면 잘 먹고 잘 지내야 한다, 가연아."

아버지의 말에 가연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할지 모를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가연을 염려하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가연은 눈물을 삼켰다.

  그날 밤, 태주는 피곤해 보이는 가연을 데리고 병원 근처의 조용한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따스한 조명에 둘러싸여 있었고, 벽에 걸린 작은 사진들과 오래된 나무 테이블이 자그마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가연아, 뭐 좀 먹어. 너 요즘 너무 안 먹는 것 같아."

태주는 메뉴를 넘기며 부드럽게 권했다.

"괜찮아, 입맛도 없고 그냥… 그냥 이대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아."

가연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태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너무 지쳤잖아. 밥은 꼭 먹어야 해. 나한테는 가연이가 좀 더 건강해지는 게 중요한 거야."

가연은 잠시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을 바라보다가 결국 메뉴판을 손에 쥐었다.

"그럼, 아주 조금만 먹을게."

두 사람은 천천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가연의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깊이 눌러왔던 감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태주는 가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잠깐 더 얘기할까? 그냥 너랑 조금 더 있고 싶어서…."

가연은 그제야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나도 네가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둘은 인근의 조용한 바(Bar)로 발걸음을 옮겨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을 마시던 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연아, 난 네가 정말 힘들어 보여서… 네가 그 마음을 좀 더 편하게 풀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가연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도 모르겠어. 난 그냥 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태주야, 너도 많이 힘들지?"

"그렇지만, 난 너를 보면 힘들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태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술잔을 통해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과 깊은 상처를 나누었다. 서로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슬픔과 위로의 말들이 천천히 술잔을 통해 흐르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 취기에 취한 가연은 태주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침대에 몸을 기대며 가쁜 숨을 고르며 태주는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오늘은 그냥 여기서 푹 쉬자,"

태주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렇게 그날 밤, 둘은 함께 지친 몸과 마음을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가연은 서서히 눈을 떴다. 옆에 누워있는 태주를 보자 복잡한 감정들이 몰려왔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속의 깊은 수치심과 혼란 속에서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현실을 직면하자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태주와 나는, 정말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고, 다시 태주의 얼굴을 보자 더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건 실수야…"

가연은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타이르며 조용히 일어나 호텔 방을 나섰다. 출근을 위해 서둘러 준비하며, 밤사이 일어난 일들을 다시 떠올렸지만 답답한 마음만이 남았다.     

  가연과 태주는 그날 이후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둘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매일같이 만나며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는 퇴근 후 태주가 가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내가 데려다 줄게.”

태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차에 올랐다.

“요즘 간병하느라 정말 힘들지?”

태주가 물었다.

“조금 힘들지만, 이렇게 누군가 날 도와주고 있다는 게 정말 위로가 돼.”

가연은 피곤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태주는 가연이 아버지 계신 병원까지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도착할 수 있도록 늘 차를 대기시키곤 했다. 밤 늦게까지 간병을 마친 후 병원 밖에 나서면, 늘 태주의 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연은 차에 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 날 차 안에서 태주가 조용히 말했다.

“너랑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나도 참 좋아. 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가연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동안 홀로 간병에 지친 마음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위로해준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잠시 둘은 차 안에 고요히 앉아 있었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 자체가 큰 위안이 되어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가연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사랑하는 감정일까? 날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참 행복하네.’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가연은 태주가 힘이 되어줄 사람이라고 느꼈다.     

  

  가연과 태주는 바닷가에서 자주 만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바다의 잔잔파도 소리 속에서 가연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파도는 끊임없이 해안에 부딪히며 울려 퍼졌다.

“가연아, 무슨 생각하고 있어?”

태주가 조용히 물었다.

“그냥… 희망을 느껴보려고.”

가연이 바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 마치 바다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아. ‘희망은 언제나 찾는 사람에게 있어, 너도 희망을 찾아봐!’… 그런 느낌이 들어.”

태주는 가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난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을 거라고 믿어.”

가연은 태주의 말에 잠시 위로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려왔다. 갑작스러운 통화에 가연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예?”

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요?”

태주는 가연의 손을 꽉 잡아주며 눈빛으로 그녀에게 힘을 전해주었다.

“내가 빨리 가야 해. 아버지 병원으로.”

가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태주와 함께 급히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연을 맞이했다.

“아버님의 폐결핵이 전신으로 전이되었습니다. 이미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치료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가연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들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 아버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가연은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감싸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버지… 저를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늘 아버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힘겹게 눈을 뜨고 가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말없이 고마움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연은 그 미소를 기억에 새기듯 깊게 바라보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마지막 밤이 되었고, 아버지는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키며 가연은 속으로 다짐했다.

아버지, 저 앞으로도 아버지가 주신 사랑을 잊지 않을게요. 제가 힘들어도,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않을게요.”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가 가연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아버지의 미소는 가연에게 영원한 힘이 되었다.     

  

  병원에 휴가를 낸 가연은 아버지 장례를 태주의 도움으로 치르게 됐다. 유골은 평생 바닷가에 태어나 바다를 바라보며 일생을 보내신 아버지셨기에 바다에 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연은 그날 밤부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고, 급기야 고열과 구토로 병원에 실려 왔다. 이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가연을 보며, 태주는 그녀의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가연은 갑작스러운 구토와 고열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가족을 모두 잃고 보호자조차 없이 홀로 아픈 그녀를 태주가 지켰다.     

"가연아, 괜찮아?"

태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고는 침대 옆에 앉았다. 가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태주야…"

가연은 힘겹게 입을 떼며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되는 걸까… 이제는 아버지도 안 계시고… 정말 나 혼자인 것 같아."

태주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조용히 위로했다.

"가연아, 넌 혼자가 아니야. 제가 있잖아. 언제나 곁에서 지켜줄게."

잠시 후 의사가 찾아와 태주에게 말했다.

"보호자 되시나요? 잠시 원장실로 함께 가 주실 수 있을까요?"

원장실로 들어선 태주는 긴장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봤다.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정태주 씨, 말씀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한가연 씨… 임신 중이네요."

태주는 순간 얼어붙었다.

"임신이라고요…?"

목소리는 나왔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도 모를 만큼 충격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임신 초기입니다. 심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영양실조 증세가 왔고, 그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지만 다행히 큰 위험은 없습니다. 환자와 태아 모두 건강한 상태입니다."

그제야 태주는 한 달 전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간병으로 지친 가연을 위로하기 위해 둘이 호텔에서 함께 보냈던 밤. 그때의 따뜻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날… 우리 아기가 생긴 거군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의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산모가 충분한 휴식과 영양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임신 초기라서 더욱 조심해야 하고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엔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가연과 아기를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

‘설마… 그때 그날?’

태주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의사에게 가연이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대답하며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가연과 자신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는 이 순간만큼은 가연을 지키고 싶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누군가를 찾는 듯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가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병실은 어둑하고 조용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가연의 창백한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혼란스러운 눈빛을 띠고 있었다. 태주는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다가, 한 발짝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가연의 손등에 닿자, 그녀는 순간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의 손길에 깜짝 놀란 듯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가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왜 병원에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태주야… 여기… 나는 왜…"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태주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채 가까이 앉았다.

"조금 혼란스러울 거야. 천천히 말해줄게."

  그의 눈동자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가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미묘하게 안도감을 느꼈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태주는 그 마음을 눈치챈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스하고 넓은 그의 품 속에서 가연은 잠시나마 평온함을 느꼈다. 그저, 온몸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가연아"

태주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많이 놀랐을 거야. 기억이 잘 안 나겠지만… 너를 여기 데려온 건 내가 아니야. 사고가 있었거든."

가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그래. 몸이 많이 지쳐서 쓰러진 거야. 의사 선생님도 네가 많이 무리를 했다고 하셨어. 잠시 쉬면서 회복이 필요하대."

태주의 말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들렸다.

가연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의 말에서 자신을 향한 따스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나 봐… 몰랐어."

태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네가 정말 열심히 살았으니까. 너무 많은 걸 혼자 짊어지려고 했어."

그의 말에 가연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비로소 그녀는 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연은 한숨을 쉬며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꼈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태주는 조심스럽게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가 그러는데, 우리 아이가 가연이 배속에 자라고 있대.”

태주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지만, 그의 말을 들은 순간 가연은 얼어붙었다.

“그래서… 속이 메슥거리고 많이 불편했던 거였고. 그 때문에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힘들어했던 거래.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푹 쉬면서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태주의 말이 하나하나 가연의 귀에 박히듯 들려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가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몰려왔고, 그중에는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그런 그녀를 보고 태주는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잘 먹고, 잘 자면 낫는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병원에 있을 동안 휴가도 냈으니까 걱정 말고 좀 쉬어. 검진이 필요하다면 내가 다 알아보고 처리할 테니까.”

태주의 그 한마디에 그녀는 잠시 안심이 되는 듯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면에서는 계속해서 질문이 일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걸까?’

마음속에서 불쑥 불안이 피어올랐다. 아버지 장한국이 어머니를 떠나 다른 여자를 택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자신도 그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그때의 상처가 아직도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고, 그런 상처가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연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혹시 이런 유전자가 내 안에서 떠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정말로 어머니처럼 되어버리는 걸까?’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배 속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스스로 다짐했다.

‘아니, 나는 달라야 해. 절대 어머니처럼은 안 될 거야.’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새로운 다짐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가혹한 운명 앞에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가연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하고 있었다. 온몸이 무겁고 마음마저 지쳐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붙잡아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만은 꼭 지켜줄 거야."

가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 안에 살아있는 작은 생명은 그녀에게는 더없이 신비로운 존재였다. 희망이라고는 찾기 힘든 이 절망 속에서도 가연은 이상하게 그 생명으로부터 따뜻함과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나에게 하늘이 준 선물 같아."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마치 그 작은 생명이 사랑을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연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당신이 남긴 유언을 따라갈게요. 진실을 밝히고, 그 도리를 지키며 살아갈 거예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가연은 마치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처럼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힘든 길이겠지만, 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결의로 빛났다. 가연은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힘들어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 생명을 위해서라도… 나는 끝까지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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