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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기 Sep 25. 2024

천륜의 사랑

  나라병원은 누가 아팠는지, 저세상으로 떠나갔는지, 언제나 그렇듯이 바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사람들의 아픔과 이별이 늘 일상처럼 이어지고 있었지만, 병원의 분위기는 언제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했다. 가연은 그러한 분주함 속에서 자신만의 작은 행복, 일명 ‘소확행’을 찾으려 애썼다. 아침 일찍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어느 날 문득 환자들이 건네는 작은 감사의 인사, 그리고 고단한 하루가 끝난 후 찾아오는 잠시의 평온함은 가연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자 행복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지만, 가연은 늘 궁금했다.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병원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고통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퇴근길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웃 가족들이 바쁨 가운데 다정한 가족들과 오순도순 함께 둘러앉아 행복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행복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행복이 그녀에게 찾아올 때면, 항상 뒤따르는 불안감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믿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가연은 혼잣말로 자신에게 물었다.

‘혹시 이 행복이 지나면 더 큰 불행이 다가오는 건 아닐까?’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함 속에서도 가연은 하루하루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며,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인해 잠결에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된 것이다. 놀란 가연은 어머니를 자신의 근무지인 나라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왔다. 응급실의 차가운 공기가 가연의 얼굴을 스치며 그녀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손끝에서 전해지던 온기는 점점 사라져 갔고, 끝내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채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가연은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은 먹먹했고, 그저 어머니가 무사히 회복하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몇 시간의 긴 기다림 끝에 수술은 마무리되었다. 담당 의사는 피가 많이 고인 뇌출혈을 치료했으나 어머니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정신없이 어머니를 걱정하며 눈물만 흘리던 가연은, 아무도 없는 입원실에서 끝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창가에 희미한 빛이 들기 시작할 무렵, 가연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원실에 엄마를 모시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멘붕, 멘탈붕괴와 함께 넋이 나가고 말았다.


  새벽이 지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는 말없이 누워만 계셨다. 집에 걱정하고 계신 아버지께 급한 상황과 엄마의 수술과 입원을 알리고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출근을 했다. 저녁은 병실에서 간병할 수 있고, 낮엔 근무할 수 있는 그래도 같은 병원 안에서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조금의 다행으로 희망을 놓지 않으며 혼잣말을 했다.

‘할 수 있다… 좋아질 거라… 믿어야 해….’ 

가연은 자신을 격려하며 마음을 굳게 잡아야 했다.     

  그날 아침,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도 어떻게 지내시는지 시간을 내어 섬에 잠깐 들러 어머니의 수술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의 체구가 유난히 작아 보였고, 그가 더욱 야위어 보이는 모습에 가연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야윈 얼굴을 보자 가연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가연에게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닦았다.

"어휴, 가연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아버지, 엄마는 아직 의식이 없어요… 하지만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연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딸. 네가 거기서 잘해주고 있으니 나도 안심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나한테 말해라."

가연은 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버지, 제가 없어서 식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혼자 계셔서 많이 걱정돼요."

"괜찮다. 그동안은 조금 대충 먹었지만, 이제 반찬가게에서 택배로 시켜놨으니까 걱정 말고."     

가연은 안도하며 아버지를 안았다.

"그래도 잘 챙기셔야 해요. 저 다시 병원으로 가야 해서… 아버지, 조만간 또 찾아뵐게요."     


  아버지의 다정한 말에 가연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아버지의 식사 문제나 돌봄이 걱정되었기에, 반찬가게에서 아버지 식사에 필요한 것을 택배로 주문해 드렸다.

  무탈하게 지내야 한다는 당부를 뒤로 하면서 다시 병원 엄마를 간호해야 하기에 새벽에 집을 나서며 바닷가에 붉게 타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용기를 냈다. 가연은 혼잣말로 다짐해 본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데, 나도 저 태양처럼 다시 떠오르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부모님을 모두 돌봐야 하는 상황이 그녀에게는 가혹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후 가연은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 회장 부인 최원심 여사가 가연 어머니의 상태를 걱정하며 위로해 주려는 마음으로 병실을 찾아왔다.

"가연 씨, 정말 많이 힘들지요. 하지만 너무 마음 무겁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어머님도 분명 좋아지실 거예요."

가연은 여사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이미 눈가에 눈물이 고여 말을 잇기 힘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사님. 이렇게 와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힘이 됩니다."

여사는 가연의 어깨를 감싸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가연 씨도 나라병원의 가족이잖아요. 어머님이 회복하실 거예요. 조금만 더 버티고 희망을 가져봐요.”

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원심은 잠시 더 머물다 가연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후 병실을 떠났다.      

  여사가 병실을 떠나자 가연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앉았다. 어머니의 차가워진 손을 잡으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희망을 되새겼다. 나라병원은 그날도 어김없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가연은 마음속으로 걱정을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라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병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으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됨을 알렸다. 익숙한 아침 간호조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가연의 마음은 잠시도 평온할 수 없었다. 오늘은 특별히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담당 의사와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평소와 다름없이 맡은 일을 해내며 시간을 보냈지만, 상담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속의 긴장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드디어 담당 의사가 가연을 부르자, 그녀는 숨을 고르며 상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상담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의사는 가연을 보고 자리에 앉으라 했다.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에 대한 최신 소견을 전해 주었다. 

  예상보다 어머니의 의식이 빨리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연의 얼굴에는 실망과 걱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담당 의사는 다행히 현재 상태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며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것은 그녀의 불안함을 잠재우기엔 부족했다.

  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담실을 나섰다. 아무리 기다려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꾸만 밀려오는 무력감에 휩싸이며, 어머니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앞에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침울한 마음으로 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어머니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연의 마음은 더욱더 애틋해졌다.     

  

  어느 저녁, 가연은 어머니 병실에서 간호를 하고 있을 때 정태주가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어머니의 상태를 묻고는 가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연 씨, 어머님께서 빨리 나아지시길 바랄게요. 많이 힘드시겠지만 잘 견뎌내실 겁니다."

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주 씨. 힘들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태주는 잠시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요."

가연은 머리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건 제가 처리할 일이니까요."

태주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둘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태주가 자리를 뜨려 하자, 가연은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그때 병원장 아들 장대한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들과 마주쳤다.

"어, 태주야. 여기서 다 보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가연 씨 어머님 문병 왔다가 이제 가는 길이야."

"아, 그렇구나. 어머님 상태는 어떠셔요?"

가연은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의식이 아직 없어요…."     

장대한은 가연을 좋아하는 감정을 품고 가연을 바라보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내고, 나도 기도할게요."

그날 저녁, 장대한은 병실로 야식을 들고 찾아와 가연을 위로해 주었다.

"당직 근무 중이지만, 잠깐 들렀어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가연은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며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조금씩 의식을 찾아가는 듯했고, 조금만 더 힘을 내자며 야간 근무를 하며 간병했다. 그런데 엄마가 호흡이 불규칙하다는 담당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갔다. 엄마는 가연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듯하자 가연은 엄마 입에 귀를 대자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가연아, 백운선사님을 꼭 찾아가 생부에 대해 들어야 한다.”

엄마는 겨우 짧은 말을 남기며 허망하게 눈을 감으셨다. 가연은 무어라 말 좀 해보라며 엄마를 안고 흐느꼈다. 

“엄마, 흐흐 억, 으윽, 끄어업, 흐으어업”          

가연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           

“무슨 말씀이신 거예요? 엄마!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녀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엄마를 향한 의문과 혼란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엄마!……"      

  가연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죽음은 가연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연은 그동안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비록 축복받지 못한 탄생으로 사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시간이었지만, 엄마의 죽음은 가연을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엄마의 장례식이 열렸다. 

     

엄마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무거운 공기가 가연을 짓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한기까지 더해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기 위해 조문을 하러 찾아왔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조문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개를 숙이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가연의 얼굴에는 슬픔과 황망함이 엉켜 있었다. 조문객들 사이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엄마의 따뜻한 미소, 손을 꼭 잡아주던 손길, 그리고 마지막 병상에서의 약해진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쁘신데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순간, 그제야 가연은 실감할 수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조문객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결국 가연은 홀로 남았다. 장례식장에는 깊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 선 가연은 말없이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메어왔고, 억누를 수 없는 외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마지막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가연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걸까요?” 

혼자 중얼거렸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차디찬 공기만이 그녀의 말에 답하듯 다가왔다. 가연은 한숨을 내쉬며 홀로 남겨진 슬픔을 삼키고 또 삼켰다.     

  장례식이 끝난 후, 집안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가연의 마음도 그와 같이 가라앉았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엄마의 흔적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사진 속 미소 짓는 얼굴,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 그리고 집안에 남아 있는 소소한 향기조차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침묵을 깨고 가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의 가슴속에서 그 유언이 떠오를 때마다 가연은 점점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머니가 숨겨왔던 진실이 이제 가연에게 모든 것을 던져주고 떠나버린 것이다. 가연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머니의 유언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연의 마음속에는 책임감과 혼란이 뒤엉켜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집안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가연은 새벽을 기다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지만, 먼동이 트면 어둠을 밀어내듯이 햇빛이 다시 그녀에게도 비춰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으로 가연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유언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가연은 어머니가 언급했던 무림사 백운선사를 찾아 길을 떠났고 길은 험난했고, 그녀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음속의 혼란과 갈등을 안고 걸음을 내딛는 가연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가 비쳤다.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남긴 진실, 그 뜻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무림사에 도착한 가연은 백운선사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백운선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어머니 심수애는 나라병원 장한국 박사와 젊은 시절 사랑을 나누었단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 하지만 네 어머니는 너를 임신한 상태였단다. 사회적 압박과 가족의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네 어머니는 너를 나에게 맡기고 무림사에 남겨두었지."             

  가연은 어머니의 고통 속에서 생리학적으로는 태어났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만들어진 과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바로 장한국 박사라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장한국 박사는 박영심과 결혼하기 전에 심수애와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네가 태어난 거란다. 그 후 네 어머니는 과거를 잊기 위해 한청연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너를 떠나보낸 것은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을 거야."         

  백운선사의 말이 끝나자, 가연은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한 남자의 배신과 한 여자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연아, 천륜과 인륜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구나.”     

백운선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천륜이란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뜻하지. 이는 끊을 수 없는 혈연적 관계로, 이 도리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늘의 법이란다.”      

가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선사는 말을 이어갔다.              

“천륜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이고, 인륜은 살아가며 선택할 수 있는 관계로 변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둘 다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도리이지.”       

가연은 그 말을 듣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가연은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            


  백운선사는 가연의 마음을 읽은 듯 그녀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손짓으로 자리에 앉히고, 숨을 고르게 한 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백운선사는 가연에게 가시고기와 우렁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와 우렁이의 모성애를 통해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설명했다. 

“천륜과 인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마. 가시고기의 부성애와 우렁이의 모성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아니요….”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에 대해 선사님은 가연에게 들려주셨다.              

“가시고기는 알을 낳고 떠나는 암컷을 대신해 수컷이 알을 지키며 산소를 공급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단다. 그리고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수컷은 생을 마감하고, 자신의 시체를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지. 이는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성애의 상징이란다.”      

백운선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연의 반응을 살폈다. 가연은 그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우렁이의 모성애’에 대해 선사님은 가연에게 들려주셨다.          

“우렁이는 새끼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면 천적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자신의 몸속에서 새끼들을 키운단다.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자라고, 결국 어미는 모든 것을 내어주며 빈껍데기만 남게 되지. 이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백운선사의 부드러운 설명 속에서, 가연은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 그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했는지를 새삼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여 자식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말에, 가연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는 듯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백운선사의 이야기에 몰입한 채,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내어주었던 부모의 모습을 새롭게 기억하며 가슴 깊이 감사와 사랑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그들의 사랑과 희생을 이제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백운선사는 가연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말했다.                

“천륜은 가족이 지켜야 할 기본도리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면 세상의 법으로 사회와 국가가 개입하게 된단다. 부모는 자녀를 성년이 될 때까지 부양하며, 자녀는 나이가 들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단다. 이는 천륜의 도리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면 인륜의 법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가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야 천륜과 인륜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천륜의 도리가 인륜의 도리보다 우선이란다. 천륜과 인륜이 무너지면, 그 결과는 패륜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도리를 지켜야만 한단다.”     

가연은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천천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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