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은 태주의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그룹과 나라병원 사이의 정략결혼의 위세에 밀려 결혼에 대한 말도 못 꺼내며 날마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인생은 미묘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태주와 그의 친아버지 장한국의 노력이 점점 결실을 맺기 시작하며, 행운이 마침내 그녀의 편에 돌아서려는 듯했다. 가연은 이제 더는 눈물을 삼키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의 시련은 마치 폭풍처럼 그녀를 휘몰아쳤지만, 내면의 강한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는 오로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이겨낼 힘을 준다는 말이다. 장한국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마침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준비가 됐다. 그는 자신이 가연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줬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이제 그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려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는 행동에 나서야 했다.
장한국은 결심 끝에 제일그룹 정영국 회장을 만나러 갔다. 그는 25년 전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고, 더는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장한국은 불안한 발걸음으로 제일그룹 본사에 도착했다. 높은 건물의 유리창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로비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이 차분한 정장을 입고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장한국은 그 낯익은 풍경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회장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심장이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과거의 후회와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영국 회장은 그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장한국을 맞이했다.
회장의 사무실은 고급스러운 가구와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이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벽에는 회장의 여러 성과를 보여주는 증서와 사진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정영국은 한 손에 골프 클럽을 들고 여유롭게 맞았다.
“장 박사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한국은 침을 삼키며 눈을 회장의 얼굴에 고정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그의 얼굴을 반사하여, 마치 그의 내면의 갈등을 비추는 것 같았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장한국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사무실에 흐르는 적막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긴장된 목소리로 이어갔다.
“25년 전, 젊은 시절의 큰 실수로 인해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고, 지금 그 아이가 저 앞에 살아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가연입니다.”
정영국의 눈이 순간 커지며 그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고,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영국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참으로 어려운 얘기를 하셨군요. 부인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장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지만, 결의에 차 있었다.
“처음에는 아내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연은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딸입니다. 이제 더는 비밀로 숨기며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영국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의 노을이 그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마치 두 사람의 마음속 깊은 상처와 후회를 감싸 안는 듯했다.
“그래요. 이해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참 마음 아프군요. 그렇다면 이제 가연과 태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장한국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이제 그 아이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가연과 태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바이오메디칼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정영국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장한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장 박사님, 가연이 이미 홀몸이 아니라는 사실은 저희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 프로젝트에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아내와 상의하여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장한국은 눈가에 맺힌 긴장된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그는 지난 과오에 대한 첫 발을 내디뎠다. 회장의 사무실 안에는 이제 희망의 기운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영국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결혼 문제는 물론이고, 가연이 그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한국은 그 말에 얼굴을 들며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한 빛이 가득했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가연이 그 일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저도 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이번 일로 제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장한국은 제일그룹과 나라병원 사이에 있던 모든 장애물을 치웠다. 그가 택한 선택은 가연과 태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오랜 고민과 내적 갈등 끝에, 그는 가연의 삶을 존중하고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지난 잘못을 속죄하는 첫걸음으로, 그는 가연이 진정한 행복을 찾는 데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며칠 후, 가연은 태주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태주의 부모님이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가연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갑작스러운 초대 소식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태주에게 물었다.
“태주야, 이게 무슨 일이야? 회장님께서 왜 갑자기 나를 만나자고 하시는 거지?”
태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차분히 대답했다.
“솔직히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런데 며칠 전에 장한국 박사님이 우리 회사에 오셨다고 하더라고.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가연은 태주의 말을 들으며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장한국 박사가 제일그룹을 방문했다는 소식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음 한편에 불안과 궁금증이 교차했지만, 태주의 부모님이 직접 만나자고 한 이상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깊게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졌다. 가연은 자신을 진정시키며, 뱃속의 생명에게 작은 위로의 손길을 보내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어.”
약속된 날이 밝았다. 가연은 태주와 함께 대저택 앞에 섰다. 태주의 집은 웅장하고도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화려한 외관과 고급스러운 정원은 태주의 가정이 가진 전통과 품위를 느끼게 했다. 가연은 집의 높은 입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리석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조심스럽게 고동쳤다. 현관문이 열리고, 태주의 어머니가 가연을 맞았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과 따뜻한 미소로 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와요, 가연 양. 기다리고 있었어요.”
태주의 어머니는 품위 있는 옷차림과 은은한 향수로 한층 더 부드럽고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차분한 인사 덕분에 가연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그러나 태주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가연은 심호흡을 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태주의 아버지가 거실로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엄격한 인상을 주는 중년 남자였지만, 그날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고, 그는 가연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가연 양.”
그는 품격 있는 목소리로 가연에게 자리를 권하며 이어서 말했다.
“며칠 전에 장한국 박사께서 우리 회사를 방문하셨어요. 그 자리에서 가연 양이 박사님의 친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어요. 그동안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잘 견뎌줘서 고마워요.”
가연은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태주의 아버지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긴장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연을 향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담겨 있었다.
“태주가 가연 양을 사랑하는 이유도 충분히 알겠더군요. 힘든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늘 의연하게 이겨내는 가연 양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계를 바라보며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태주와 함께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 생각에는 아기도 곧 태어날 예정이니 결혼식을 가능한 한 빨리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준비에만 집중하길 바라마.”
그의 말에 태주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가연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었지만, 이미 각오를 다지고 온 자리였다. 그녀는 태주와 함께할 미래를 마음속에 그리며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태주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지금 홀몸도 아닌 만큼 병원 일은 잠시 쉬고, 태교에 집중하는 게 집중하는 게 어떨까? 사실 우리 회사와 나라병원이 추진 중인 공동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일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주 2회 정도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재택으로 해도 괜찮겠다. 이 분야는 가연이가 가진 전문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기회니까 우리와 함께 일해주면 좋겠다."
태주의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 태주는 조심스레 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연아, 네 생각은 어때?”
가연은 태주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따뜻한 시선이 서로를 감싸는 순간, 그녀는 마음속에서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도… 태주 씨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할게요.”
태주의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앞으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 보자고.”
가연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젠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태주와 그의 가족이 자신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삼키며 그녀는 감사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저녁, 가연과 태주는 태주의 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긴 여운을 느끼며 조용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로등 불빛이 창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동안, 그들의 대화는 희망과 설렘,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가연은 태주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우리, 정말 잘 해낼 수 있겠지?”
태주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쥐었다.
“물론이지. 우리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가연의 삶은 이제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상은 정해진 틀 안에서 조용히 흘러갔고, 간호사로서의 일은 보람과 성취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가연은 백운 선사와의 오랜 대화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는 자신만의 미완성된 이야기가 존재했다.
가끔 혼자 바닷가를 찾아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짠내가 그녀의 코끝을 스칠 때면, 어릴 적부터 간직했던 의사의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다에서 다짐했던 결심은 간호사로서의 삶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미묘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가연은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오랜만에 무림사의 백운 선사를 찾아갔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그녀는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부드러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점차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무림사는 고요하고도 장엄한 풍경을 자아냈다. 높이 솟은 사찰의 지붕은 빛바랜 기와로 덮여 있었고, 곳곳에 늘어선 석등이 저녁 햇살에 반짝였다. 무림사의 정원은 오래된 소나무와 야생화로 가득 차 있어 고요하면서도 생기로 가득했다.
가연은 백운 선사를 마주했을 때, 그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스님, 지금의 제 삶은 충분히 소중하고 보람되지만, 한편으로는 제 마음속에서 여전히 허전함이 느껴져요. 어릴 적 바다를 보며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꿈이 있었지만, 결국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죠. 이제는 아이를 임신했고, 결혼도 준비하고 있는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백운 선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가연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해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선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연아,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하늘의 섭리가 너를 인도한 길이다. 네가 간호사로서 쌓아온 모든 경험과 환자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그 모든 순간은 하늘이 내린 큰 인연 속에 자리하고 있지. 그러나 네가 마음속에서 간절히 바라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너를 이끄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
가연은 선사의 말을 들으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린 시절의 결심은 단순히 잊힌 꿈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 한편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열망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의 일상에서 느껴졌던 허전함은 이 미완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꿈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 단지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운명과 맞닿은 길임을 느꼈다.
그 후로 가연은 의대 진학을 위해 필요한 공부를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밤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병원 근무를 마친 후에도 도서관에 들러 관련 자료를 읽었다. 힘든 순간마다 백운 선사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가연은 차츰 의대 입학을 위한 시험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몇 번의 도전 끝에 그녀는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은 기쁨과 안도의 눈물로 가득 찼다.
의과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가연은 병원에서의 경험과 간호사로서 환자들과 나눈 수많은 순간들이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동기들보다 환자의 상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실습 중에도 환자들의 사소한 불편함을 먼저 알아채고 다가가며 따뜻하게 응대했다. 교수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끔씩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연은 매일같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환자 한 명 한 명을 대할 때마다 진심을 다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치료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의 의사로서의 길은 늦게 시작되었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결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어.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거야."
가연의 인생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그 길 위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운명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의과대학에서의 힘든 나날 속에서도, 가연은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며 어린 시절 바다 앞에서 결심했던 의사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가연은 깊은 고민 끝에 결국 나라병원에 사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태주의 아이를 임신한 지금, 의대 진학을 앞두고 그곳에서 더 이상 일을 이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병원에서의 수많은 순간과 관계들은 그녀의 마음에 복잡한 상흔을 남겼다. 특히, 생부인 장한국 박사와의 갈등은 그녀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병원의 복도를 걸으며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익숙한 소독약 냄새, 지나가는 의료진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 그 모든 것이 가연의 심장을 조여 오는 듯했다.
진료실 문 앞에 다다른 가연은 잠시 멈춰 서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문을 두드리기 전, 그녀의 시선은 병원 내 곳곳에 걸린 사진들과 상패들에 머물렀다. 이곳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앗아간 장소였다. 심호흡을 하고 노크 소리를 냈다.
“들어오세요.”
장한국 박사의 낮고 권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연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 뒤에 앉은 장한국의 얼굴에는 여느 때처럼 침착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미세하게 굳어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박사님,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으실까요?”
가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장한국은 짧은 침묵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무슨 일이니, 가연아? 몸은 괜찮니?”
그가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그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봉투는 사소해 보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무거웠다.
“저, 오늘 사표를 내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장한국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한순간, 그는 얼어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차분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사표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건조했지만, 깊은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가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료실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 병원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여기는 저에게 너무 많은 상처가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와 제 아이를 위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연의 목소리는 한층 단호해졌다.
장한국은 손끝을 떨며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어쩌면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대비되지 않은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가연아, 네가 떠나면 이제 가까이서 볼 수 없겠지? 그리고 나… 나는 널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절망이 섞여 있었다.
가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알아요, 박사님. 하지만 그 노력이 저에게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눈물이 고이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가 태주의 아이를 무사히 낳는 거예요. 저와 아이를 위해서 이제는 제 길을 찾아야 해요.”
장한국은 가연의 결심을 느끼며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나간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자신이 가연을 위해 했던 선택과 그로 인해 생긴 상처들. 그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의대에 합격하여 진학해야 하는 이유도 또한 있어요. 늦게나마 꿈꾸던 희망이 이번에 이루어졌거든요.”
가연의 목소리에는 새로운 다짐이 담겨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그녀의 결심을 격려하듯 부드럽게 흔들렸다.
장한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대에 합격한 것 정말 축하한다. 그래서… 의대에 다니도록 배려해 줄 테니 병원은 계속 다니면 어떨까?”
그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가 엿보였다. 가연이 혹시라도 다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묻어났다. 하지만 가연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저는 여기에 더 이상 제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박사님, 만약 정말 저를 아버지로서 지켜주고 싶다면, 제 결정을 존중해 주세요. 떠나는 게 저와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장한국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가연이 겪었던 고통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연아, 네가 겪은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떠나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처럼 작았다.
가연은 그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박사님, 제 아이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어머니가 필요해요. 그리고 저는 이 병원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은 그가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장한국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채로 가연의 사표를 손에 쥐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가연은 그의 침묵을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제가 박사님이 아닌 제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장한국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지그시 감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연아… 네가 가는 길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그의 말에는 진심 어린 소망이 담겨 있었다.
가연은 그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깊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조용히 진료실을 나섰다. 복도는 고요했고,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워진 듯했다. 눈앞에 펼쳐진 병원의 풍경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