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뚝한 연필

창작의 고통. 그리고 쾌락.

by 정송화

비가 점점 많이 온다. 비가 그치면 못 이긴 척 집에 갈까 했는데 비는 쏟아지기만 한다.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멍하니 음악을 듣다가 생각한다. 그래, 연필을 소모하자. 뭐라도 써야 연필이 소모되니까.


너무나도 텅 빈 나는, 왠지 모르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고 있는데도. 하지만 뭉뚝한 연필을 꾹꾹 눌러가면서 글을 써본다.


매일 한 페이지씩, 이 공책(편의점에서 산 A5공책)에다가 연필로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뭐라도 좋으니까. 매일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내게 주어진 공책과 연필들에게 작은 쓸모라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다 쓴 공책, 다 쓴 연필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나를 위해서.


내가 느끼기에, 재능 없는 열정은 저주이다. 나는 '글'에서 확실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빈 공책을 뭉뚝한 연필로 채워가는 행위는 소름 끼칠 만치 행복해서, 나는 도대체 어째야 할지 모르고 그저 글을 써 내려가는 수 밖에는 없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어릴 때에는 '가치가 없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안 했다. 수치스러워서. 하지만 서른 인 지금, 나는 이 의미 없는 세상에서, 글을 쓸 때 느껴지는 이 쾌락만으로도 충분히 글을 쓰자고 생각하고 쓰고 있는 것이다.


뭉뚝해진 연필은 생각보다 닳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이 뭉뚝한 연필심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될 때까지 글을 쓰기로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서 "사실은 이 쾌락이 가장 큰 재능일지도 몰라"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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