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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 응급 Mar 10. 2023

S2. 원초적 본능

4. Role playing,  역할 놀이의 법칙


교육은 인류를 특별하게 하는 문화 산물이다.

 선대의 압축된 학술 지식을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전달하는 역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종족, 문화, 세대를 어우르는 교류가 일어나고, 반복된 교류를 통해 다양한 지식 간 교류 장벽이 낮아져 쉽게 어울리며, 집단에서 제외되지 않고 살게 하는 사회적 능력을 함께 전파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유전자에 각인되지 않은 사회성이라는 능력(최근 이 능력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는 주장이 나오긴 한다만)덕분에 인류는 다른 종족을 뛰어넘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1편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인은 특유의 고도화된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 설레발과 함께 ‘너도, 나도, 모두’라는 모토는 지금도 통용되고, 거부감이 있을지언정 거절하지 않는 사회성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포용되었다. 심지어 남과 어울리는 걸 즐기지 않더라도 ‘그게 내가 알 바야? 날 내버려 둬!’가 아니라, ‘나 혼자 있고 싶어. 날 좀 내버려 둘래?’라는 식으로 혼자 있는 것에 타인의 양해를 구하는 게 익숙하다. 이는 눈치라고 불리는 사회적 능력 중 하나로, 공감력에 대한 소양 중 상대방의 비언어적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라 설명할 수 있으며, 한국인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눈치가 발달했다.

  발달된 눈치는 재미있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눈치를 통해 상대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호감과 즐거운 관심으로 이끄는 가면을 쉽게 제작했으며, 반대로 내면에 가지고 있는 어두움, 비열함 등의 모습을 숨기는데 탁월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보이는 ‘나’를 위해 정교하게 제작된 가면을 쓰기를 꺼리지 않는다. 가면은 실제보다 성숙한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얻는 사회적 이득이 상당하기에, 인간은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듯이 가면을 쓴 삶은 위험을 동반한다. 외압 혹은 과도한 자기 절제로 인해 가면과 본모습의 괴리감이 한계를 넘어가 버티지 못하고 맨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가면을 썼을 때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이는 타인에게 불완전한 자기 절제력과 추한 본능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이상향을 본 땄던 모습에서 바닥으로추락한 모습을 한 번에 보여주어 실제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걔가 그런다고? 진짜?”

 여기나 저기나 남 뒷얘기는 흥미진진한 단골 소재이다. 나는 과 특성상 병원의 여러 분야와 교류하기 때문에 친분은 없어도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흘러지나치는 인연이기에 언쟁을 일으키거나, 얼굴을 붉힐 일이 없어서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종종 천사같은 사람들의 그럴 리 없는 뒷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다.

 오늘 야식으로 보쌈을 먹으며 나온 뒷얘기의 주인공은 같은 연차의 타과 전공의 A였다. 수술과의 이미지와 다르게 얼굴도 곱상하니 하얗고,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넉살도 있고. 응급으로 걸기엔 애매한 협진이다 싶으면 ‘아이 선생니임, 이거 아닌 것 같은데요? 솔직히 아니다! 협진 이번에 빼주시면 다음 번 것 꼭 잘볼게요.’하며 적당히 협상도 할 줄 아는 친구라서 마냥 좋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과에서는 엄청 무서운 선배란다. 그때는 이제 막 후배가 생긴 2년 차 주제에 무슨 선배짓거리할 게 있다고 하면서 코웃음 치며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쌈이나 싸먹었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1년이 지나고 연차가 올라, 상급년차가 되었을 때 오랜만에 A가 응급실에 내려왔다. 대부분의 과는 저년차가 응급실 콜을 받기 때문에, 상급년차는 저년차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만 응급실에 출몰한다. 따라서 고년차가 된 최근에는 A를 응급실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고, 가끔 오전 회진을 돌러 응급실 내려올 때나 만날 수 있었다. 직접적인 친분으로 커피 한 잔할 일은 없지만 그 동안 응급실에서 같이 밤을 새웠던 정이 있어 눈인사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항상 보던 떡진 머리에서 멀끔한 모습으로 환골탈태한 게 웃기기도 하고 뿌듯한 기분이었는데. 오랜만에 새벽에서 마주친 오늘은 뭔가 달랐다. 자다와서 삐죽거리는 머리에, 초록색 수술복을 잠옷으로 입은 모습은 수시로 드나들던 이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A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그날 밤 진행된 협진이 좀 복잡했던 것은 사실이다. 여러 전공과가 함께 협진을 진행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 어느 과가 주치과가 될 것인가에 대해 설왕설래를 하는 과정에서 주치의 과는 A가 몸담고 있는 과가 맞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제 선에서 해결하려던 A의 후배들만으로는 협진을 완료하기 어렵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급년차인 A에게 환자에 대한 노티(notify)가 좀 늦어졌다.

 사실 저년차의 입장에서 곤히 자고 있는 상급년차를 깨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웬만큼 급하지 않으면 선배를 재우고(?) 오전에  노티하는 게 일반적이다.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는 빠른 협진 완료가 우선이지만, 당직 때마다 밤새고 오전부터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타과 전공의들이 안쓰러워서 엄청 급하지 않으면 오전까지 유예를 주는 융통성을 발휘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환자는 소위 깔아 둘 수 없는 환자였다. A의 후배들은 처음엔 애매한 케이스라고 판단하여 협진을 빼려고 시도했다가, 응급의학과 측에서 반려하자 차선책으로 오전에 A에게 연락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응급의학과에서 압박을 주며 지금 연락하라고 압박을 주니, 그 새벽에 A를 깨운 것이다. 당연히 A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차라리 이른 새벽에 연락이 왔었다면 일을 처리하고 잠을 잘 수 있었을 텐데, 어중간한 이 시간에는 다시 자러 가도 이전처럼 길게 숙면을 취할 수 없다(물론, 피곤하면 언제 어디서나 잘 수 있는 게 전공의이긴 하다). 그리고 A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머리 박아.”

키보드를 두들기던 A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 게 믿기지 않았다. 옆의 컴퓨터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우리는 A가 장난치는 줄 알고 피식거렸지만, A가 발언을 철회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눈치 보던 2명의 A의 후배들이 스테이션 안에서 머리를 박았다. 군말 없는 걸 보니,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이게 2000년대 병원에서 일어난 일인가 의심할 정도로 50년 대 조폭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모습을 직관하게 되었고,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소당할 수 있는 장면이 길어지자 우리는 점점 지켜보기 불편해졌다. 그래도 타 과의 일에 함부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가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보다 못한 나이트 차지 간호사 선생님이 A를 향해 한마디 했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A는 평소에 살갑게 지냈던 간호사 선생님 말마저 들을 체 하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A가 제 후배들을 일으켜 세운 건 협진 완료 버튼을 누른 뒤였다. A는 깔끔하게 윗년차의 소명을 다 한 뒤, 응급실을 빠져나갔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협진 해당 환자와 보호자에게 오전 중 입원 병실로 이동하게 될 거라는 친절한 설명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 이후, 가끔 A를 마주칠 때마다 싸늘했던 그날 새벽이 생각나서 예전처럼 반가운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A가 피곤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게 A의 본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던 한 꺼풀의 가면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환자에겐 친절한 의사로(심지어 그 달의 친절 타과 전공의로 여러 번 뽑힌 전적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후배들에겐 악마로 존재했던 A. 누구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식적일 수 있다고 하지만, 180도 달라지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그날 밤의 A는 지금도 소름돋는 경험이었다.

 



 가면낀 삶은 어떤 부류의 특징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다.

 환자들도 때에 따라 가면을 갈아 끼는 경우가 왕왕 있다(흥미로운 점은 환자의 가면 전후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게 서울 중심부로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인데, 소위 상류 사회의 교류를 위해 자신의 역량보다 과한 가면으로 포장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면을 쓰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남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자 하는 욕망이 구체화된 것이 가면인데, 우리는 가면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면의 방향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종래에 가면이 나의 본모습이 되는 순간, 가면 없이도 진실되게 타인과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끔씩 가면을 벗으며 불완전한 자아의 모습으로 회귀할 때 얻는 쾌락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면을 쓴 상태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위해 가면을 벗어던지지 않는다. 원초적인 욕구대신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며 치환된 기쁨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모습을 타인이 모르게 한다. 하지만 정제 및 절제에서 해방된 순간의 쾌락은 굉장히 크다. 마치 에덴 동산의 사과와 같은 것이라서 한번 맛을 보면 끊기 어렵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가면을 벗기 위해 가면과 본모습 사이의 타협점을 찾는다. 그 결과, 타인과의 교류에서 얻는 이익의 경중을 따져 가면을 쓴 모습으로 상대해야 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나누어 행동하는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후자에 속하는 대상에게는 애써 좋은 모습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들앞에서는 원초적인 모습으로 하위 단계의 욕망을 채운다.

 조금 더 교활한 사람들은 타인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만 가면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언행 불일치가 대표적이며, 기분 따라 행동이 달라지거나 신경질적인 걸음걸이와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여차하면 벗어던지려고 만지작 거리는 가면을 굳이 벗겨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 가면이 표현하고자 하는만큼의 사람과 교류할 수 있으며, 벗겨낼 경우 타인에 의해 본능을 드러냈음을 이용하여 뻔뻔하게 욕구를 충족시킬지 모르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고도의 스트레스가 남발하는 이 사회에서, 적어도 병원에서 일 잘하는 사람보다 눈치 빠른 사람이 잘 살아남는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눈치가 빨라야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그가 가면을 벗어던지기 전에 원하는 것을 제공하여, 모두가 가면 쓴 상류 사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응급실은 눈치가 필수적인 요건으로,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진 구분할 것 없이 극한을 경험하기 때문에 가면이 벗겨질랑 말랑한 사람들 투성이므로, 그들의 욕구를 잘 파악하여 가면을 잘 덮어 놓아야 평화로운 응급실이 될 수 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타인의 개걸스러운 원초적인 모습에 무뎌지는 연습을 하는 게 낫다.


 능글맞아지거나 무뎌지거나. 응급실에서는 언어 외의 모든 것을 보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파인아트아메리카, https://fineartameri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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