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제나 응급 Apr 25. 2024

S2. 원초적 본능

15. 동조의 법칙


 사회적 인격은, 인간의 본능적으로 무리를 이루고 싶은 본능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보다 정교하고 지적인 발달과정을 거쳐왔다. 하지만, 개별이 아닌 집단 단위 조명하면 비단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집단일 때 인류보다 훨씬 파괴적이며 역동적인 종족들을 우리는 이미 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특별한 존재이며, 지구를 지배하는 이유는 우리가 때에 따라 개인으로, 혹은 집단의 일원으로 유연한 존재인 덕이다.


 인간은 개인의 깊이에 대한 고찰과 동시에 무리의 구성원이 되고자 갈망한다. 무리에서 생활하며, 무의식적으로 남들과 동화되려고 한다.

선천적 인격에 더한 후천적인 개인의 인격으로도 충분한 사회구성체의 조건이 되지만, 사회적 인격은 매 주변 환경이 변화할 때마다 새로운 인격으로 바뀌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기존과 다른 무리에 속하게 되면, 그 무리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고 같은 넘치는 믿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정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분위기에 쉽게 감염되고 위험을 감수하며 기꺼이 희생하고, 비이성적인 행동까지도 거리낌 없다. 이러한 사회적 인격은 상황에 따라 개개인의 본질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따라서 군중심리, 혹은 집단 히스테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너넨 괜찮니?”

“나야 일단 2차 병원이니까 그럭저럭인데. 넌 괜찮아? “

“뭐, 우리도 원래 전공의 없이 돌아간 지 좀 돼서 그냥저냥. 근데 돌아가는 꼬락서니 하면 영 빠르게 끝날 것 같진 않아.”

“그렇지?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와 조심스럽게 근황을 물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살고 있단다. 그제야 우리는 본래 하고자 했던 주제로 통화를 이어갔다.

최근 의료계는 파업으로 인해 어수선하다. 전문의 면허를 취득하고 이제 좀 적응했나 했더니, 의료 체계가 뒤숭숭해져 버렸다.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 않는 나는 상대적으로 파업에 대한 영향이 적다. 하지만 대학병원을 비롯한 2차 병원 봉직의, 개인 병원, 의원까지 모든 의사들의 속이 말이 아닐 테다. 기존과 같이 근무를 하고 있는 나도 매일 뉴스를 보며 심란해하는데, 파업의 최단에 서있는 의대생, 전공의, 전임의 그리고 대학병원 종사자들은 더 심할 것이다. 파업이 두 달을 넘긴 지금, 이 불안함은 무엇일까. 대의를 위해 희생된 가치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


약 3년 전, 우리는 똑같이 파업을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약 2주 간의 기간 동안을 내리 꿈을 꾼 것 같았다. 데모나 행진은 민주화 항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전 세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걸 어느새 내가 하고 있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SNS, 라이브 방송 실시간 소통을 통한 결집이었다. 하루 종일 동기, 동료들과 대화하며 나와 우리의 행동에 정당화를 부여하고, 외부압력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의료에 대의를 위한 소신 발언이며 그를 위한 면허 정지란 희생은 감내할 만했다. 고작 1년이니까.


 하지만 사실 굉장히 두려웠다. 외압으로 인해 1년 쉬어야 한다는 기회비용보다, 이런 사태에 지쳐 스스로가 무너져 수련을 포기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리더는 기회비용을 ‘0’으로 수렴하게 할 것임(면허 정지가 불법적임을 강조했었다)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 측은 물론 반대 측의 수장에 대한 믿음은 한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면허 정지 외의 개인적으로 느끼는 허무함과 불안감에 대해서 원인도 모르고 감내해야 했다. 거시적인 대의를 위해 눈앞에 놓인 희생은 개인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천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파업에 동참했던 이유는 ’ 공동체‘의 힘이었다. 그동안 소소하게 술자리에서나 말이 나왔던 의료 시스템의 부조리, 수련 과정의 부조리함 등이 집단의 입을 통해 실제로 발표되며 (현재도 그렇지만, 파업에는 의사 수 동결 외에도 여러 항목이 존재한다)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어쩌면 내가 푸념만 했던 사회가 바뀔 수도 있다면, 희망이 가시화가 되었다. 맨날 싸우고 다투기만 했던 타과 전공의와 같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부수적인 유대감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 파업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라는 공동체 의식은 대의를 위한 찬성이 개개인의 사고를 앞지르게 했다.


다시 전공의가 된다면 파업에 동참할까.

 

 사실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파업을 하면서 사회적 관점에서 성장한 것은 맞지만, 반대로 힘든 점도 많이 배웠다. 구성원 간의 와해로 인한 배신감, 개인의 윤리적 사고에 대한 비자율성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외부의 좋지 않은 시선 등. 아직도 그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추스르고 타인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을 배워가는 도중 다시 발생한 파업에 쉽게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더 오래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동참했을 것 같다.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다시 한번 집단의 힘에 매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감정을 공유하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선사시대의 주술에서부터 거대 종교 집단에 이르기까지 집단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의식들은 주변 곳곳에 있다. 내가 이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표현이 바로 ‘동조’이다. 말, 혹은 표정이나 몸짓, 투표와 같은 행위로 자신이 사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주인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다만 사회화의 독특한 특징이자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자. 공동체라는 것이 더 큰 공동체인 사회의 규칙이나 법규를 무시하고, 그들만의 동조가 개인의 양심이나 결단력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큰 나머지 ‘우리‘의 구조, 방향성, 그리고 본질에 대해 분석하기를 꺼리면 안 된다. 자기 이해가 유연하지 못한 경우 고도의 사회화는커녕, 우리는 그 집단을 ‘인류’가 아닌 ‘호모사피엔스‘ 무리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인격의 성숙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개인의 능력을 상위하는 존재이다. 인류사회는 집단이기 때문에, 집단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고, 그것이 인간이 뛰어난 이유이다. 하지만 집단의 공동 방향성과 진행 과정에 대한 자기 진단과 정화 과정은 필수적이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 출처 : ‘화가의 작업실’, 쿠르베, 오르세 미술관, 1855]

작가의 이전글 S2. 원초적 본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