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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서 Feb 07. 2021

비워내기

기억의 파편

   

나는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방에 온갖 종류의 물건을 쌓아놓는 맥시멀 리스트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물건을 수집하는 버릇이 있어서 책이나 좋은 공책, 메모지가 보이면 수집하곤 한다. 이런 수집벽은 내 방을 종이와 활자로 가득 차게 했다.


더 쌓아뒀다가는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정리했다. 쓸모없는 노트나 책, 메모는 버리기로 했다. 몇몇 노트나 책은 하도 꺼내 보지 않아서 입으로 후 하고 불자 먼지가 날렸다. 책 먼지가 코와 입으로 들어가 쿨럭이며 노트를 집어들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누렇게 변색이 됐었다. 노트를 펼쳐보며 이렇게 오랫동안 내 생각을 적어놓은 글을 방치했다니 조금은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메모지나 노트에 적어놨던 글은 나를 부끄럽게 하기도 했고 '내가 이런 생각을 했나?' 싶어서 놀라기도 했다. 특히 한 노트에 적은 글이 정말 그랬다. 어렸을 적 봤던 영화에 대한 리뷰로 가득 찬 노트였는데, 사실 리뷰라기보다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걸 적어둔 일기장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열심히 정성 들여 쓴 리뷰 노트였지만 손으로 써서 그런지(아직도 글씨를 더럽게 못 쓰는 내가 왜 손으로 썼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점점 귀찮아져서 별점과 짧은 줄거리를 기록하고, 나머지는 곳곳에


'아, 이걸 본 내 시간이 아깝..'

'주인공과 적대자의 대립 구도가 너무 별로'

'여기서 이 인물이 이렇게 죽는 게 말이 되나? 이야기 구조가 너무 부실함'


따위의 쓰잘데기 없는 말로 가득했다.


반면, 한 노트는 나를 놀라게 했는데 노트에는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적혀있었다. 그 노트를 보면서 그때만큼 부지런하고 꾸준히 쓰지 못한 나를 뒤돌아보기도 했고 소재를 통해 당시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메모지에 써놨던 글 중에 나를 반성하게 했던 생각은


'쓰지 않고 생각에 담아두는 것은 무의미하게 부유할 뿐이다. 잡생각을 덜 하고 쓰기를 많이 하자'


라는 글이었다. 또 가장 나를 자극했던 글도 있었다.


'인생이 가끔 영화랑 똑같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결말이 있고, 사람의 인생도 결국엔 끝이 있다. 주인공은 항상 무엇인가 시도를 한다. 거기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며 교훈을 얻는다. 교훈을 얻은 주인공은 결국 끝에 가서 변하고 성장한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성장드라마다. 우리 인생도 성장 드라마다. 주인공이 욕망이 없고, 행동하지 않으면 영화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도 보지 않는 재미없는 영화가 된다. 나중에 내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 재미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Do something!(뭐든 해라)'


흔히 시나리오 작법 책에는 이야기에는 3막 구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시작점, 중간점, 결말점이다. 시작점은 주인공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어떤 사건이나 계기 등을 말한다. 이로 인해서 주인공의 삶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중간점에서는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는 전환점이 필요하다. 계속 같은 사건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이야기가 힘을 잃거나 보는 사람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보통 120분 영화를 기준으로 60분~70분에 해당한다. 결말점에는 주인공을 클라이맥스에 몰아넣게 되는 상황이나 사건이 필요하다.


노트의 글을 읽고 내 인생은 지금 어느 지점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그렇게 놓고 보니 나는 아직도 시작점에 있었고,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한다면 50살이 돼도 고작 중간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시작점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쓰고 무언가를 시도하다 보면, 거기서 배우고 또 성장할 수 있다.


인생이 영화 같다는 생각을 적어놓은 노트에 있던 원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써니>, <과속스캔들>의 강형철 감독이 쓴 네이버 캐스트에 쓴 에세이이며, 사실 좋아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이 글에는 감명을 받았었다.


'뒤늦게 진학한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감독이 되기 위해 조연출 생활을 몇 해 했으나 번번이 제작이 무산되며 젊음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재주 없을을 탓하며 열심히 살지 못한 인생을 후회하던 어느 날 인생을 후회하는 남자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모하게 시나리오를 일곱 편 정도 썼고 두 편으로 감독 준비를 하다가 결국 그중 하나인 [과속스캔들]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됐다'

'언젠가부터 삶이 이런 글쓰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에서 늘 길을 잃고 좌절하지만 계속해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길을 찾는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이 삶의 플롯이 들어맞음을 확인한다. 신기한 일이다'

'그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수없이 그러하겠지만 글 속에서 삶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는 또다시 무언가를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다시금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길이 늘 쉽지는 않겠지만, 뭐 달리 마땅한 방법도 없지 않은가'

전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278&cid=58818&categoryId=58818


과거의 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고, 원하는 만큼 이루지 못한 일이 많았다. 어쩌면 그게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누가 떠먹여 줘서 알게 되는 지혜는 금방 잊는다. 하지만 직접 겪고 난 후 알게 된 지혜는 오래 남는다. 그게 잘못된 지혜라면, 또 고쳐 쓰면 된다.


집에 있던 낡은 노트와 수첩, 각종 메모가 적혀있는 메모지, 너무 오래돼서 낡고 해진 책 몇 권을 버리기로 했다. 과거에 여러 가지 생각을 적어둔 노트도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중에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글은 컴퓨터로 타이핑을 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시켰다.


지금은 과거를 뒤돌아보며 감상에 젖어 나를 추억하기보다는 인생의 한 챕터를 넘겨 새로운 챕터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과거에서 벗어나 미련 없이 비워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챕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새하얀 백지장부터 새로운 것들을 써내려 가자니 막막하기도 하지만, 뭐 달리 마땅한 방법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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