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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iday May 06. 2023

엄마처럼 살고 싶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쿨한 엄마, 쿨하지 못한 딸...

집안을 둘러보면 늘 할 일 투성이 이다.

여기저기 걸어놓은 빨래들도 제자리를 찾아

정리해야 하고 옷장 속의 차고 넘치는 묵은 옷들과 잡동사니들도 정리해야 하고 부엌에는 왜 그리

안 쓰는 물건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화장실 에도 없애야 하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이럴 땐 문득문득 엄마생각이 난다.

내 어릴 때 엄마는 아침에 학교가라고 나를

깨운 적이 없다.

그냥 청소를 하신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일어나시자마자 온 집안 창문을 다 열고 총체로 먼지를 터신다.

그다음 이불을 개는데 이불 안에 누가 있던 없던 

그냥 개어버린다.

겉 이불을 걷어가면 바로 바닥의 요 밑으로 숨는다 하지만 그 요 도 바로 휙 낙아채서 이불장에 넣고 

본격적으로 빗자루질을 하신다. 물론 방바닥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냥 비질을 계속하신다. 

거기까지 버티면 오래 버티는 거다. 

그 이상 버티면 그다음에는 걸레질인데 걸레질할 

때까지 버티다간 그 걸레로 얼굴도 문지르고 궁둥이도 맞고... 엄마의 아침 루틴은 늘 한결같았다. 

집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해서 늘 바쁜 엄마이지만

아침청소를 거르신 적이 없고 매일매일 버릇처럼 청소를 하셨다.

늘 정돈되지 않은 내 집안을 보면  엄마생각이 나고 나도 엄마처럼 매일 청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장착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이럴 땐 엄마처럼 살고 싶다.

그 옛날 엄마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일어나서 연탄보일러에 연탄을 가셨다.

주무시기 전에 연탄불을 확인하고 언제 갈아야 할지를 잘 가늠했다가 정확하게 그 시간에 일어나서 

연탄을 갈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수고가 너무 고생스러워 보였다.

또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차를 기다렸다가 

쓰레기 수거 트럭이 지나가면 우리 쓰레기

통을 직접 수거하는 분께 전해주어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하는 그 일도 너무 수고스러워 보였다. 연탄 갈고 쓰레기 버리는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작은 상점을 하다 보니 엄마와 아버지는 늘 바깥일에 바빴고 우리 삼 남매의 양육에는 그리 큰

신경을 못쓰신듯했다. 시험을 보는지, 학교행사가 있는지 없는지, 특별활동은 뭘 하는지, 담임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관심이 없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학창생활을 보냈다.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내 돌아 늦게 들어와도, 성적이 떨어져도 별다른 잔소리를 안 들었기에 내 장래에 대한

인생설계를 그야말로 내 맘 데로 하면서 부모님과 갈등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집착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만 했지 엄청 집착을 했던 것 같다.

집에 들어올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나면 머릿속으로 온갖 범죄드라마를 쓰고 있고, 아이들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 다 알고 싶어 했고,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서 내가 먼저 설계도를 그리려 했었다. 아이들과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엄마생각이 났다.

어려운 살림에 삼 남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시느라 수고한 세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이 먹어서도

철없는 딸 생각에는 우리 엄마는 나를  참 쉽게 키우신 거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아이들을 키울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럴 때는 엄마처럼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처럼 살고 싶었다.


일하는 엄마와 살다 보니 다정다감한 보살핌을

못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도시락도 아침에 먹던 반찬을 담아서 알아서

싸갔고, 크고 작은 학교행사나 졸업식에도 부모님이

학교에 오지 못했다. 방목하는 부모밑에서 느끼는 자유로운 꿀맛은 꿀맛 데로 챙기면서 그럴 때는

또 무관심한 부모님에게 불만을 갖으며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깊은 두메산골에서 살다가 집안어른의 중매로 사진 한 장 보고 결혼을 한 엄마와

하고 싶었던 것도 많고 꿈도 많았으나 전쟁 후의 고단한 삶에 모든 걸 포기하고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버지는 서로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르고 표현방법도 달라서 두 분 삶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뱉는 형인 아버지와 순응하는 형의 엄마라서 엄마가 많이 참고 견디면서 살았기에 

큰 고비 없이 두 분이 오랜 세월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참고 사는 엄마를 보면서 많이 답답하고 

안타깝고 힘이 들었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결혼에 대해서도 많이 회의적이었다.

이런저런 성인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엄마는 어느 날부턴가 아버지에 대한 

위인전을 쓰고 계셨다. 사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고 그러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살면서 고생을 정말 많이 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삶을 사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억은 

다 잊으셨는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좋은 기억밖에 없으신 듯하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위인전급이다, 세상에 그런 훌륭한 분이 없는 듯...

남편에게 크고 작은 불만으로 툴툴거리다 보면 가끔 엄마생각이 난다.

소중한 사람이 막상 내 곁에 떠나면 이런 작은 툴툴거림도 나중에는 다 좋은 추억으로 바뀌어 있을까?

지난한 세월을 좋은 기억으로만 추억하는 엄마처럼 살고 싶기도 하다.

멀리 한국에 살고 계신 엄마와는 자주 통화를 하는 편이 아니다.

지금도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는 엄마는 한 달에 2~3번 짧게 하는 통화로 만족해하신다.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도 하루가 멀다 하게 밖으로 나가는 딸과 사위를 보면서

단 한 번도 '오늘은 또 어디 가냐' 묻지 않으시고 

그냥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 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울 엄마 참 여전히 쿨 하시다 감탄하면서 동시에 성인이 된 내 딸이

어디 나간다 하면 또 '어디 가냐' 묻고 있는 나 자신이 참 쿨하지 못하다 자책하곤 한다.


나는 여전히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엄마처럼 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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