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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오늘도 홈쇼핑 중

세상과의 연결을 쇼핑하다

by 퇴B


요즘도 TV 홈쇼핑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네, 있습니다.

TV 홈쇼핑 매출이 빠르게 감소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그 뉴스가 방영되는 그 시각,
우리 엄마는 여전히 매진이 될까 조마조마하며
상담원 연결음을 듣고 계신다.

엄마 카드값을 보면 언제나 일정하다.
십만 원 이상 지출된 내역은 병원비 아니면 홈쇼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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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마는 홈쇼핑을 좋아할까.

엄마는 홈쇼핑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거기엔 늘 최신 유행이 있고,
새로운 신약이 등장하며,
“연구 끝에 개발된 의료기기”가 소개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청소기나 화장품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홈쇼핑은 단순한 판매 채널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창구’다.
내가 사는 세계가 아직 살아 있고,
나도 그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안심의 증거.

엄마는 빨래하느라, 장사하느라, 밥 하느라
날 키우는 동안 멀어진 세상에 대한 부채를
홈쇼핑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일시불로 갚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새 세월은 훌쩍 멀어졌고,
다시 세상과 가까워지려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홈쇼핑은 대신 말해준다.

“아직도 모르세요? 이게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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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말로 하면 그건 FOMO(Fear of Missing Out),
즉 기회를 놓쳐 ‘소외될까 두려운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젊은 세대가 SNS에서 트렌드를 놓칠까 불안해하듯,
엄마 세대는 홈쇼핑에서
‘세상의 업데이트’를 놓칠까 봐 불안해한다.
그 불안이 채널 앞에서
지갑을 여는 손으로 번역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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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홈쇼핑은 그 불안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마치 친구처럼 공감해 주며 말한다.

“우리 엄마들 모임 갈 때 입을 옷 하나 없잖아요~”
“애 키우랴 살림하랴 손에 물 마를 틈 없었는데,
매끈한 손 가진 친구 보면 속상하시잖아요~”
“이 나이 땐 관절 튼튼한 사람 어디 있나요~
튼튼한 관절만큼 부러운 게 없잖아요~”



맞는 말 같지만, 듣다 보면 이상하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불안’의 리허설이다.

홈쇼핑은 엄마의 결핍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보상 방법까지 제시한다.

“괜찮아요, 그 모든 문제는 이걸 사시면 싹 해결됩니다!”



솔로몬도 이런 솔로몬이 없다.
사기만 하면 외로움, 건강, 인간관계, 명예와 애정까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 말한다.
아니지, 솔로몬이라기보다 램프 속 지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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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엄마는 ‘찌든 때를 싹 빼준다’는 세정티슈를 샀다.
옷에 묻은 얼룩까지 없앤다며
십 년은 된 듯한 블라우스를 꺼내셨다.

못 입는 옷이라면서도
그 옷을 아직 왜 갖고 계셨던 걸까.

엄마의 기대와 달리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물건이 아니라 자기 탓을 한다.

“방송에선 잘 빠지던데...
얼룩이 너무 오래돼서 안 빠지나 보다...
옛날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닌데요?
그때 나왔어도, 그 얼룩은 못 지우는데요?!

결국 그 세정티슈는
가스레인지랑 냉장고 손잡이를 닦는 ‘물티슈’가 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계속된 실패에도 왜 포기하지 못할까?

‘마법의 세제혁명’, ‘마법의 냄비’, ‘요술방망이’—
하여튼 홈쇼핑에서 파는 모든 '마아법'들이
엄마의 마음속 얼룩진 상처를 지워주고,
찬란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줄 수 없단 것을
언제쯤 인정할까?




하긴,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온디맨드 서비스가 넘쳐나지 않던 시절,
정규 방송이 끝나고 잡음 섞인 밤 텔레비전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 목소리를 내던 건 홈쇼핑뿐이었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아
불러볼 이조차 없는 새벽,

사실 세상엔 나뿐인 거 아냐? 했던 시절-


쇼핑호스트의 간드러진 “고갱님~”에 맞춰
“네에~” 하고 대답하던 적이 있었다.

저 옷만 사면,
저 다리미만 있으면,
저 주스만 먹으면
남들만큼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었던 시절.

홈쇼핑은 나를 불러주는 유일한 존재였고,
그 외로운 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너무 외로워
쇼핑호스트의 말에 맞장구치며
내가 아직 ‘존재함’을 느꼈고,
엄마는 너무 두려워
쇼핑호스트의 말에 지갑을 열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에 안도한다.

나도, 엄마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다시 연결되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엄마와 세상 사이에
튼튼한 다리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거린다.





엄마, 근데—
이럴 때 먹으면 좋다는 약은 안 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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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이나 남아있는 '레볼루션 티슈'를

모시고 있는 분들께 바칩니다...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

내일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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