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언어로 일상을 기록하기
'드르륵, 드르륵'
이른 아침, 눈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하얀 눈이 밤새 쌓였나 보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부터 도로에 쌓여있는 눈을 치우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제설 작업은 아침에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무사히 학교에, 직장에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로를 깨끗하게 치워준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날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대신, 출근길은 지루하다. 구글맵으로 확인하니, 45분이 걸린다. 그 잠깐의 시간,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기 위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출근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밤 10시가 넘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모. 잘 지내고 있었어요?"
"오! 작가님"
신춘문예 입상 이후, 외가 식구들에 자랑한 엄마 탓에 난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모, 작가는 부끄럽게.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책을 출간하면 그 도시가 난리 나겠어요!"
서로의 웃음소리에서 차디찬 겨울 날씨의 흐릿함이 어느새 생기로 가득했다.
차창 밖으로는 눈송이가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차 안은 이모와 나누는 다정한 언어들로 금세 온기가 돌았다. 이모는 조심스레, 하지만 진심을 담아 내게 말했다.
"수진아, 신춘문예 입상한 글 읽어봤어. 어떤 단어가 맞을지 모르겠는데, 네 글은 참 투명하고 예뻐. 글에서 네가 느껴져. 정말 잘 썼어."
'잘 썼어'라는 그 담백한 칭찬 한마디가 가슴에 콕 박혔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포착하려 했던 그 찰나의 순간의 글을 온전히 알아봐 주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모가 전해주었던 그 말은 평범하고 사소했지만, 타국에서 매일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나에게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가장 든든한 응원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느낀 감각의 결을, 그 세밀한 풍경을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낀다. 최근 이호파파님이 이끄는 독서모임에서 이런 고민을 나눈 적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그는 나에게 책 한 권을 추천했다. 바로 조르주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였다.
"보통의 연대기들이 무시해 버리는 것, 일상적인 것, 배경이 되어버린 것... 그것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조르주 페렉
조르주 페렉은 광장에 앉아 버스 번호와 비둘기의 날갯짓을 하나하나 기록하며 장소를 '소진'시켰다. 그에게 소진이란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당연해서 투명해진 일상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치열한 응시였을 것이다.
나에게도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특별한 사건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평범함을 낯설게 바라보는 끈기 있는 관찰. 오늘 아침 나를 깨운 제설차의 진동과 수화기 너머 이모의 다정한 음성을 기록하는 행위는, 사라져 버릴 찰나에 영원한 숨결을 불어넣는 나만의 소진 방식이다. 이제 일상을 다정한 언어들로 '소진'시켜보려 한다. 짜증 섞인 한숨 대신 건네는 따뜻한 안부로, 지친 마음에 생기를 채워주는 세밀한 관찰로 말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사정을 품고 살아간다. 아침부터 쏟아진 눈 때문에 주차장에 갇혀 지각의 초조함과 씨름하는 동료, 아픈 아이를 겨우 달래 어린이집에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한 동료. 잿빛 하늘처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들의 하루를 가만히 들여다봐 주는 다정한 말 한마디일 것이다.
오늘 아침,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 깨달았다.
'눈 오는 날에 다정하게 건넨 몇 마디의 언어가 이렇게 포근하고 생기를 넣어줄 수 있구나.' 다정한 말 한마디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무심코 지나치는 숨겨진 다정함이다. 어쩌면 삶의 진실은 우리가 소진시키지 못한 채 흘려보낸 그 사소한 순간들 사이에 고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익숙한 풍경 앞에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진다. 오늘 내가 놓친 다정함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떤 언어로 구원해 낼 것인가.
우리의 삶은 매일 오가는 사소한 언어들을 통해 비로소 반짝이는 역사가 된다. 오늘 당신이 건넨 다정함은 누군가의 힘든 하루를 피워낼 소중한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