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또 입을 옷이 없다

분명 작년에도 입고 살았는데, 왜 기억이 안 날까

by 이수 E Soo

겨울이 끝날 무렵, 한낮의 온도가 갑자기 20도까지 올라간 날. 결국 코트 속에 입고 있던 반팔 차림으로 오후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어본다. 빽빽하게 옷이 걸려 있는데도 작년 봄에는 무엇을 입었는지 기억나는 옷이 없다. 도대체 뭘 입고 살았던 걸까? 바뀌는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사게 되는지, 스스로도 참 의문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심리학적 이유가 숨어 있다. 심리학자 Barry Schwartz가 말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이 바로 그것이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뇌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정 마비 상태에 빠진다. 꽉 찬 옷장은 나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혼란을 주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익숙한 것을 배경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작년에 입었던 옷들을 더 이상 새로운 정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뇌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일시적으로 기억을 불러오는 데 혼선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은, 지금의 내 변화된 에너지와 무드에 맞는 새로운 자아를 찾고 싶다는 뇌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의 직장 생활은 이런 나의 옷장 심리학에 새로운 레이아웃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에서 격식을 차린 정교한 디자인과 브랜드를 선호했다면, 이곳 캐나다에서는 훨씬 담백하고 실용적인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재미있는 점은, 20대 동료들이 나의 오늘의 착장(OOTD)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입은 청바지나 재킷을 보며 “어디 거야?”라고 브랜드를 물을 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이거? 한국에서 가져온 거야(From Korea).”

캐나다를 대표하는 Lululemon, Canada Goose, Roots, Arc'teryx 같은 브랜드들이 주는 심플하고 기능적인 미학도 훌륭하지만,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디테일과 한 끗 다른 실루엣은 이곳 동료들에게 자극이 되나 보다.

한국은 디자이너들의 개성이 담긴 옷이나 팝업 스토어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아이템들이 많다. 티셔츠 하나를 고르더라도 캐나다의 기성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섬세한 실루엣이나 독특한 감각이 숨어 있다. 어쩌면 나의 체형과 취향에 맞게 옷을 골라 입는 즐거움과, 한국 패션 특유의 섬세한 디테일이 캐나다의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것 아닐까.

해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대며 옷장 앞을 서성이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나의 옷장 속에는 실용적인 캐나다의 정서와 한국의 감각적인 디테일이 기분 좋게 섞여 가고 있다.

Screenshot 2026-03-31 at 2.42.40 PM.png
Screenshot 2026-04-01 at 11.46.35 AM.png
아리찌아와 룰루레몬 브랜드

https://brunch.co.kr/@97728075db7b442/16

나도 몰랐던 Made in Canada 브랜드는 오히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안다. 한국과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가격 때문인지, 종종 배송을 부탁받는다. 특히 Canada Goose의 가격 차이는 꽤 크다.

한국 겨울 날씨에 Canada Goose까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브랜드는 4월까지도 영하로 내려가는 캐나다의 추위를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캐나다에 도착한 그해에 바로 점퍼를 구입했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옷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입는 캐나다 브랜드는 Lululemon과 Aritzia다. 이 브랜드들은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활동하기에 매우 좋다. 소재가 편안하고 스포티한 느낌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실용을 중시하는 캐나다와 달리, 한국의 직장 문화나 OOTD 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이러한 환경과 문화의 차이가 우리가 입는 옷의 성격까지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옷차림을 예의와 전문성의 표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다만 요즘은 그 기준도 점차 유연해지며, 개인의 스타일을 드러내려는 흐름이 함께 나타난다. 반면 캐나다는 실용성과 활동성이 우선인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한 차림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Lululemon 같은 스타일이 직장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이 여전히 단정하고 완성도 높은 인상을 중시한다면, 캐나다는 그거 너답다는 말처럼 개인의 취향과 편안함을 존중한다. 자차 이동과 변덕스러운 날씨, 높은 드라이클리닝 비용 같은 환경적 요소는 실용적인 옷차림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든다.


희한하게도, 한국을 방문하는 몇 주 동안은 캐나다에서 가져간 옷들을 정작 한국에서는 입지 못한다.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결국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계절과 분위기에 맞게 옷을 새로 사 입게 된다. 그렇게 사 온 옷들을 다시 캐나다로 가져오면 이곳의 일상 속에서 훨씬 멋스럽게 입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옷장을 살펴보다가 입을 옷이 없다며 투덜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용히 웹사이트를 열어 장바구니에 여러 벌의 옷을 담는다.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지?” 하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오늘 하루의 감정 소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