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서평
NFT는 그것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싸다.
복제품이 아닌, 기술로 보장된 오리지널 오직 하나.
우리는 NFT다.
왜 인간이 소중하다고 할까?
그냥 위선적인, 정작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논리적으로 납득을 시도해본 적도 없는 상투적인 말 같이 들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나온다.
넌 소중한 존재야
무조건적인 감성팔이 말고, 이러한 명제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찾아보자.
사람들은 의미에 집중한다. 미술품도, 겉보기에 구분할 수 없는 복제품도 철저하게 걸러내어 원작만 가치를 가진다.
이렇듯 예술 시장은 공급이 오직 하나로 한정되어 있기에 특수성을 지닌다.
내가 경제학을 좋아하니 굳이 경제학으로 비유하자면 당신도 공급이 극단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희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은 가치를 갖나보다.
그런데 타인 입장에서 보기엔 각 개인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매일 보다보니 그 생명의 경이로움 따위는 새삼스레 느끼기 힘들다. 존엄하긴 한데,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 사람을 재단하고 능력으로 평가하고 인간소외를 한다.
공급이 단하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비슷한 사람들은 너무 많고 그 개인에 대해서만 수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타인들의 관점에서 당신은 그리 소중하지 않다.
지금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죽어나가고 우리나라에서도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지만
사람들은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누워서 유튜브나 보며 각자의 삶에서 유영하기 바쁘다.
당신이 아무리 큰 고통을 받아도 전 세계가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는다.
직접 인연을 맺고 관계를 형성한 주변인들에게는 소중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시간과 의미를 공유했기 때문에.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중한 걸까?
유한성을 갖기에.
엄청난 우연의 산물이기에.
남들에게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이다.
빅뱅으로 인해 생성된 원자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떠돌다
우연한 결합으로 우리의 의식이 생겼다.
태어난 환경도, 겪게된 경험도, 너무나도 우연적이고 매우 복잡하고
현재까지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미친 요소가 무한대이며
우리가 내린 사소한 선택들, 그 선택의 선택지에 따른 모든 가능세계도 무한하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의식은, 두 번 다시는 없다.
감각 또한 유한해서,
당신이 당신으로서 존재하며 따스한 햇살의 감촉을 피부로 느끼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며 풀내음을 느끼는
그런 건 다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소중하다'라는 명제는?
'내가 소중한'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기에 그 사회에서 이러한 명제가 참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윤리는 사실 모두 사회계약이다. 내재된 공감과 도덕감정도 사회 속에서 살아오며 지속적으로 진화해 온 산물이다.
일종의 자연적 사회계약이라고 할까.
책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보았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흄이 이야기한 공감론에 내 사유를 더한 이것이 나의 윤리관이다.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가 이러한 사유과정을 선물해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존재하며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을 느끼는 것'
이 책 '작별인사'에서는 이것을 삶의 의미로 삼고 살아가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을 통해 내가 느낀 바는 영화 '소울'이 던지는 메세지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영화는 자신의 재능을 발현시키고, 인정을 받아 꿈을 이루는 재즈 피아노 아티스트, 흔한 주인공이 꿈을 이루는 감동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하지만 엄청난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반전보다도 이 교훈, 영화 전체가 말하는 중심 '메세지'의 반전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주인공은 삶이 꼭 '대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는 이유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큰 업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업적이 얼마나 대단하든,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기에.
주인공은, 행복이 그리고 삶이.
거리의 햇살과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 동료의 농담이나 소소한 웃음
그런 차분하고 잔잔한 일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랫동안 태어나길 거부했던 문제의 영혼도 주인공 곁에서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며
이를 통해 삶의 매력을 느낀다.
이 두 이야기에서 말하는 메세지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실존주의의 핵심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이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현재에 더 집중하게 해준다.
명상에서도 호흡에 집중하라고 한다. 존재하는 것 자체를 느끼라는 것이다.
우린 미래만을 바라보며 미래에 갇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한다. 현재를 살지 못하니 삶도 없다.
미래 속에 사는 삶은 무궁함도 없다. 빨리 끝나 버린다.
이 책은 존재에 대해 얘기하며 사회 속에서 지친 당신을 달래주고
미래 속으로부터 꺼내
현재의 삶을 살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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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경이롭다. 삶은 소중하다. 삶은 충만하다.
- 두 번의 성폭력을 겪고, 우울증과 PTSD를 극복한 내가 이 책을 읽고 든 생각
난 사실 나라는 자아에 갇혀 있다. 내 뇌로 사유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무한의 관점에서 보면 난 찰나를 머물다 가는 원자의 결합, '존재'보다는 '현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시간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시간도. 흘러간다. 과거가 된다.
까마득한 옛날이 된다.
그러나 우린 지금 현재다
우린 현재에서밖에 살지 못한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관념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쩌면 삶은 무한하다. 현재는 영원히 펼쳐져 있기에
지금 이 순간 무궁하고 영원한, 현재를 느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죽기엔 너무 아깝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정념이든, 어떤 고통이든
본인의 선택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억만겁의 시간 끝에 주어진 이 단 한 번 뿐인 기회가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졌다.
무한의 관점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다
그 문제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든 사실
목적과 본질에 집중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숭고미가 부각된다.
김영하 작가의 본질을 꿰뚫는 체계적인 철학적 사유와 이를 잘 녹여낸 숭고미.
꼭 읽기를 추천한다.
미학에서 숭고미란?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라오콘과 두 아들이 뱀에 의해 죽어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실러는 이 작품을 보고 '자유롭다'고 했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물리적인 몸이 심각한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을 때, 인간 최고의 자유인
물리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칸트의 영향을 받았는데,
칸트는 인간이 자연의 위대하고 무한한 힘을 볼 때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나약하다는 사실을 대조적으로 직감하게 되며, 육체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의 힘에 대한 어떤 느낌을 얻게 된다고 했다.
평소 우리는 정말 바쁜 일상을 보낸다. 욕망을 추구하고 사회 속에서 더 나은 인정과 평판, 위치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이러한 경쟁을 위한 '속세틱'한 야망, 성실을 미덕으로 여기며 이 세상에만 갇혀,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간다. 고3은 대학이 다인 줄 아는 것처럼.
하지만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게 되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눈앞의 환상과 물리적 동물적 육체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동물적 본능 이상으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더 큰 가능성을 느껴 영적 경험을 하게 된다고 칸트는 말했다.
칸트는 한계를 느끼고 그럼으로써 한계지어진 부분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마주하는 경험을 숭고라고 불렀고 실러는 자연에서 나아가 죽음에서도 이러한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작품 <작별인사>는 유한성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실존주의적 자각이랄까,
휴머노이드와 줄기세포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론과 유한성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결론을 명쾌하게 내려주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선물하고 숭고미를 가져다준다.
예술은 치유한다.
본질을 보여주고
영에 집중하게 해준다.
정신의 해방을 불러온다.
예술, 그중에서도 문학의 역할을 뇌리에 박아놓게 해준 작품.
김영하 작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