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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Nov 08. 2023

"위악이었다."

선함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떨어지는 낙엽과 피부에 닿는 낯선 온도에 알아차리게 되었다. 가을이 왔다. 괜시리 헛헛한 마음에 흔히들 외로워진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가을 타나 보다’ 하였다. 무엇도 소중하지 않고 대충, 어느 것 하나 마음 깊이 들어오는 게 없었다. 사람을 적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심심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마음이 공허할까, 생각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보니 역시 계절이 문제야, 하고는 ‘가을 타나 보다’ 하였다.

  

 친한 친구의 전화가 왔다. 그도 역시 요사이 외롭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시끄러운 공감을 나누고는 또다시 고민해보았다. “무엇이 문제지? 아무리 봐도 우리에겐 문제가 없는데,” 하며 푸념만 늘어놓다 끊었다.


 끊고 나서, 학교 세례준비 교리 수업에 갔다. 그 날 수업에서는 신부님께서 ‘상실’에 관해 이야기해주셨다. 삶에 있어서 느끼는 모든 스트레스와 공허감은, 어떠한 것에 대한 상실감이 그 근원이라고. 소중한 어떤 이에 대한 상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의 상실, 달려나갈 목표에 대한 상실, 의미에 대한 상실, 선에 대한 상실.     


무언가 감이 오려는 느낌이 들었다. 긴 물음의 답을 찾을 것만 같은 오묘한 느낌.


거짓말같이, 그 순간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 친구였다. 그는, ‘오늘은 나의 삶의 터닝포인트였어,’하고 말했다. 그 친구는 그날 자신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며 자신이 쓴 글 한 편을 보내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위악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구나.


이어 말했다. “우리는 악을 연기했던 거야. 함부로 선해지기가 두려워서. 대학에 와서 많은 사람들과 가벼운 관계를 맺고 일과 돈을 위해 살아가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어. 누구 하나에게 큰 마음을 쓰면 이상해 보였고, 꿍꿍이 없이 정말 선한 의도로 무언가를 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어. 무언가 좋은 것을 할 때는, 그 명분 뒤에 있는 내 사익을 변명처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


정말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원래 진심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누군가 나만의 특별한 장점을 묻는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진심’이라 답할 정도로, 무엇을 하든 열정으로 대하고, 누구든 사랑으로 대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도 했다. 입시와 같이, 평가와 목적이 있는 것에도 보이는 것과 효율에 집중하기보다 본질을 찾고 ‘진심’으로 대했으니. 일곱 살 때, 유치원에서 ‘작은 가슴, 가슴마다 고운 사랑 모아, 우리 함께 만들어봐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노래 가사를 배워오고는 하트를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하트들을 그려 ‘이렇게 된다면 온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찰 거야!’ 하던 내 모습이 늘 뚜렷이 생생했다. 이 순간을 떠올리며 삶의 모토로 살아오던 내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나는 진심을 보이는 게 두려웠구나. 세상은 소중하게 대할수록 상처받는 것이 많아진다는 어른들의 진리를 깨달아버렸구나. 상처받기 싫어서, 내가 밀쳐지기 전에 밀어냈고 순수함이 순진함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바보 같아 보이기가 싫었구나. 연하고 보드라운 마음일수록 으깨지기도 쉽다는 것을, 그래서 꽁꽁 감추고 마음의 문을 닫아 빛이 들지 않았던 것이구나. 세상의 진심이 아닌 것들에 얼굴의 근육을 굳히고, 그 무표정으로 나를 무장했구나.


 선함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유별나네’ , ‘착한 척하지 마’하는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내가 감히 선함을 위해 노력해보겠다,’말할 수 있는 용기. 많이 부족한 내 모습에 실망하고 계속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겠노라고 감히 결심해보는 용기, 섬세한 마음을 쓰겠다고 상처받을 구실을 스스로 늘려보는 용기.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에너지를 쓸 용기.


 나는 친구의 고민 끝에 나온 그 진솔한 진리를 듣고서, 비로소 치유되었다. 그래, 위악이었다. 

그 말을 딛고서 이제야 다시 시작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어린 나와, 소중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찼던 내 세상을 되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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