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냐는 너의 질문에
해맑게 대답하던 우리의 탓일까,
너희의 그 책을 그렇게
장난스럽게 읽던 벌일까.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게 되었다.
계절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공기의 차가움이 피부에 처음으로 닿을 때
다시 오롯이 느낀다.
그때로 돌아온다.
PTSD는 남용으로 인한 그 빈도 때문에
무게는 퇴색되고 의미는 가벼워졌지만
사실 원래 그리 가벼운 말은 아니다.
외상적 과거 경험을 공유한 우리는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 감각이 이상해지고,
과거가 현재인지 현재가 과거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내가 나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헷갈릴 정도의 정신병적 망상이다.
가장 친하고 소중한 이들마저 낯설어진다.
지금 이 공간이 낯설어지고
내가 나인 느낌을 잃게 된다.
내가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다 잃어버리게 된다.
그때 그 시점에 내 삶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시간이, 멈춘 느낌이다.
그때에.
나는 아직 그때에 있다.
비유가 아닌 사실으로.
해리적이다,
다행인 건 내가 아직 나를 잡고 있다는 점.
다시 9월이 왔고,
쌀쌀해진 공기와 함께
또다시 돌아왔다.
과거의 나는 아직 안쓰럽고
난 아직 자기연민을 끊어내지 못했나보다.
늘 홀로 떠나던 것의 버릇일까,
지독한 역마살인지.
늘 떠나던, 어딜 가나 전학생의 신분이던 난
그 세계들을 남겨버리고 또 떠났다.
변하는 너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돌아가면 그대로일 것 같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내 과거 시계도 돌아간다.
2년 만에 기억도 1년이 흘렀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렇게 과거를 현재와 동시에 다 살아내고 나면
언젠가 두 세계가 합쳐지는 날도 오겠지.
지독한 이인증에
칼을 대면 돌아올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다가도,
약속과 사랑을 떠올리며 다독인다.
강렬한 현재는 현재 같은 과거로 남는다.
치열한 과거는 현재로 남아.
그게 내가 버틴 방법이겠지만
후유증은 어쩔 수 없나보다.
.
.
.
4년 후의 9월
중첩된 외상적 경험의 끝점을 찍은
19살의 9월도 그렇게 끝났다.
그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너는 그걸 알았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흩날리는 날짜였다면
살면서 자연스레 옅어졌을텐데.
덕분에 세게 되었다.
참 잔인한 것 같다.
축하받아야 할 날 잊기 위해 발버둥친다니.
12시가 되는 게 무서웠다.
그 날에 있는 게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정의를 공부하고 법을 다루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 돈을 받은 조건 때문에
이제는 언급할 수도 없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두 번 다시는
너의 성취를 이용해 다가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 풀어냄이
고통의 절규가 아닌
문학적 이해가 되길
한 때의 표상이길,
극복의 증거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