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내일 회고록 3] 가스라이팅과 '역'가스라이팅

by 이 오늘내일
너 왜 나 가스라이팅 해?
Or
그 사람이 나 가스라이팅해서 헤어졌어

요즘 주변에서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곤 한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혹은 사적 관계에서 타인의 행동과 말로 인해

본인의 자아정체성이 훼손되어 일반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했다고 토로한다.


너_이거_나한테_가스라이팅_하는거야.png 이미지 출처 : TVING <환승연애3>


<환승연애3>의 서경 X 주원 커플은 '가스라이팅'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이별했다.

눈이 아프다는 서경에게 주원은 선풍기 앞에서 자서 그런 것이라고 답했고

서경은 연인이라면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게 먼저라며 언성을 높였다.

계속되는 언쟁 끝에 주원이 '너 이거 나한테 가스라이팅 하는 거야'라고 말했는데

이 말로 상처를 받은 서경은 3년 간의 만남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 한 마디, 단어 하나로 남이 되는 게 연애이고 또 이별인가 보다.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작의 한 형태로서 상대방의 현실 인식, 기억, 감정 등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부정해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판단력 등을 약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해당 용어는 1938년 영국의 연극 ‘Gas Light’에서 유래했는데

주인공이 아내를 정신적으로 조작해서 자신의 기억과 판단을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가스등(Gas Light)’이 점점 어두워지는 장면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부정과 거짓말은 아내의 기억과 인식마저 조작하며 역으로 남편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학대와 폭력, 우리는 무엇을 / 어디까지 / 얼마나 감내하여야 하는가.


이후 1944년 미국의 조지 큐커 감독이 이 연극을 영화화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대중적인 언어로 만들었고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선사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금도 그의 섬세한 내면연기, 눈빛, 그리고 다소 극화되어 표현된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눈에 선하다.

일종의 정신적 학대를 통해 그의 인간성이나 인지적 능력이 파괴'되는' 혹은 '당하는' 모습을

묘한 이질감거리감을 통해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300px-가스등_포스터.jpg 영화 <Gaslight> 포스터


가스라이팅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한 말싸움이나 충돌을 뛰어넘어

인간의 현실 인식과 자아존중감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심리적 조작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의 흔한 행동에 대해 한 기사에서는 아래와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지속적으로 거짓말하는 행위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무시해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행위

의도적으로 애정이나 관심을 차단해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행위

문제를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는 행위

피해자의 감정이나 우려를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는 행위

잘못을 부인하거나 책임을 떠넘겨 피해자가 자신이 원인이라고 믿게 하는 행위

상대방을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몰아넣어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게 하는 행위

피해자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행위

(출처 : "내가 또 문제야?"...그 사람, 당신을 조종하고 있단 신호는? - 코메디닷컴)





다만,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책과 언론 등에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밈(meme)'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계할 만하다.


'역가스리팅은(Reverse Gaslighting)'가해자가 피해자와 자신의 역할을 교묘하게 뒤바꾸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무력화하여 대화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는 사람에게 "네가 너무 예민해"라며 상대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평가하거나

"네가 먼저 그랬잖아"라고 비난하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 것 뿐임에도,

"너 그거 나 가스라이팅하는 거야"라고 개인의 가치관을 프레이밍(Framing)하는 것도 유사하다.

이미 상대에 대한 답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행동하기만을 강요하고 강제하기 때문이다.


사실, 가스라이팅은 심리학적 용어로 심리적 조작과 감정적 학대를 쉽게 단언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평생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며 성장한 인간 개인이

타인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모든 심리적 영향이나 갈등을 가스라이팅으로 볼 수는 없으며, 인간 간 감정 충돌과 서로 다른 시선, 그로 인한 오해는 관계 형성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요즘은 단순한 갈등에도 '가스라이팅'이라고 낙인 찍으며 타인의 의도를 함부로 해석하고는 한다.

상대방은 무조건 가해자, 나는 무조건 피해자라는 왜곡된 구조가 마련되면 그 누구도 대화할 수 없다.

지난 회고록에서도 고찰했다시피 이 세상의 모든 언어와 감정이 이분법적 역학을 따르지는 않는다.


인간관계는 흑과 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회색지대에서 서로 실수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가스라이팅은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현실 왜곡과 통제 욕구가 핵심이다.

가스라이팅은 강력한 심리적 학대이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개념이다.

인간 사이의 충돌을 무조건적인 학대로 치환하는 것은 현실 이해와 자기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갈등상황에서는 감정의 원인과 흐름을 정확히 이해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가치관의 차이를 좁힐 수 없을 때는 서로 인정하고 각자의 영역 보호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나의 관점에서 타인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오해해서

증오로 가득한 하루를 보낸다고 해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는 중요하지만

지나친 방어는 현실을 왜곡하고 관계를 망치니까.


후회와 상처의 여정 속 밤잠 못이루는 당신,

오늘 밤은 조금 더 포근하기를 바라며.


.

.

.


origami-7924845_1280.jpg


작가의 이전글[오늘내일 회고록 2] 자존심 VS 자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