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_감성에_대한_단편적_고찰
오늘내일 회고록 첫 번째 테마로 이성과 감성에 관한 소고를 담고자 한다.
최근에는 감성적이라는 개인의 평가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듯 하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모르고 감정기복이 심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줄 위협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흔히 MBTI 'T'로 대표되는 냉철한 이성과 합리성이 현대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그리고 적당하게(a.k.a 알잘깔딱센),
감정에도 완급 조절이 필요한데 감성적인 사람은 중용의 미학을 깨우치지 못한 것처럼 대우받는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이해할 여유는 부족하니 마땅한 귀결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구조주의의 토대로서 대립적 이분법(dichotomy)을 제시한 인물이다.
여기에서 이분법이란 단순히 둘로 나눈다는 의미를 넘어서,
언어의 본질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이 두 개념은 상호 의존적이면서 서로를 통해 의미가 드러나는 하나의 관계성을 구축하게 된다.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의 어둠을 이해할 수 있고 올곧은 직진 속에서 역행하는 후진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
사회의 '틀'을 형성해서 관계와 차이의 구조로 이루어진 체계를 완성해냈으니 굉장히 합리적이다.
모든 것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사이의 회색지대나 연속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데리다 등으로 대표되는 후기 구조주의 학파들은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고자 했다.
'해체'는 어떤 개념이나 텍스트 속에 숨겨진 모순, 억압된 의미, 이분법적 위계를 폭로하고 흔들어
그 안에서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철학적·비평적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논리적이고 일관돼 보이는 개념이나 텍스트가
사실은 내적 모순과 사회적 억압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실제 사람들의 언어 사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일 뿐 아니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최근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경향성을 보면 과거 20세기 후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과 여성, 좌파와 우파, T와 F, 청년과 노인, 과거와 현대. 모든 이데올로기가 서로 대립하고 경쟁한다.
끊임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갈등을 하나의 과업처럼 학습한 것과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서로 다른 MBTI를 가진 이들끼리 유튜브 궁합을 보고는 '역시 우리는 맞지 않아'라고 단정하며
구분짓기('부르디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넘어가겠다)를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방어한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성적 개인과 감성적 개인 모두의 협업이 필요하다.
사람 사는 문제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실질적인 대안 제시에 기여할 수 없고
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하기만 한다면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귀결되어 문제는 되풀이 될 것이다.
이성과 감성은 대립적 개념이 아니기에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강성적인가. 혹은 이성적인가.
감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성은 또 무엇인가.
인간은 항상 유사한 상황에서 동일한 답만 이끌어내는가.
일관된 해답 속에서 개인의 경향성을 쉽게 단정할 수 있는가.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감정까지 숨길 필요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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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감성과 감성적 이성에 대한 복잡하고 다층적인 고찰 속에서
현대인의 방어기제로 인해 가장 중요한 본질은 과거로 역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