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차에서 성 베네딕도의 영성에 흠뻑 취한 후 우리는 카스텔루치오 디 노르차로 향했다. "La Fiorita"라는 야생화 축제가 열리는 곳,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비밀의 꽃 계곡이라는 이야기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차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고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더 현실 같지 않았다. 이른 아침, 햇살은 수줍게 산자락을 따라 흘렀고 골짜기에는 안개가 머뭇거리며 아직 떠나지 못한 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아끼며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구도 손대지 않은 신의 화폭처럼 모든 것이 순수했고 완벽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곳은 내 마음속에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 마지막 굽이를 돌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실제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붉은 양귀비, 파란 수레국화, 노란 데이지들이 고요하게 피어 있었고 나는 말없이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마 당신이 엄청 좋아할걸?" 그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상기된 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때, 가슴 뛰지 않아?" 정말 내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손을 내 심장 위에 가져다댔다. "어... 정말 이렇게나 크게 뛰네." 그도, 나도 놀랐다.
아마도 차로 가는 길이었지만 차바퀴가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바람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기분. 그리고 트렁크에는 캔 막걸리와 안주가 실려 있었다. 마음도 정말이지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거의 다다랐고 그 순간 나는 꽃들에 둘러싸였다. 왜 나는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을까.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뭇한 미소로 그런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가 다가와 내 앞에 서며 눈을 마주쳤고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꼭 천국에 온 거 같다, 그치?”
우리는 꽃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고 나는 아이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 웃음 속에 그 어떤 말보다 큰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 정적을 깰 만큼 분명하게. 그는 웃었고 나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트렁크에 다 챙겨왔지." 트렁크를 열자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식량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캔 막걸리, 진공포장한 묵은지, 마른안주, 멸치볶음 같은 것들. 꽃밭 사이에서 펼쳐진 소박한 음식들은 그 무엇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나는 막걸리 한 캔을 따서 그에게 건넸다. “우리, 이 맛에 여행하지.” 우리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캔을 부딪쳤다.
꽃밭에 앉아 꽃잎을 들여다보았다. 고운 잎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정훈희의 오래된 노래 한 줄이 바람을 타고 흘렀고 그는 그 노래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막걸리도 이런 천상의 막걸리가 있을까. 나는 스르르 취기에 이끌려 꽃밭 위에 누웠고 그도 옆에 함께 누웠다. 하늘은 참 파랬고 꽃향기는 몸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리…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내가 조용히 물었을 때 그는 나직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하는 곳. 세상 끝인데… 마음은 처음 시작인 곳.”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슬퍼서 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날 사랑해요?” 그는 대답했다. “응. 근데 너처럼은 못할 것 같아. 넌 사랑을 줄 때 남기지 않고 다 주잖아.” 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았고 말없이 가만히 옆에 누워주었다.
그 시간만큼은 모든 게 정지된 것 같았다. 바람도 숨도 마음도 멈춘 채 우리 둘만 세상에 남은 것처럼. 그리고 그 행복이 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닦지 않았다. 나도 감추지 않았다. 꽃향기, 햇살, 막걸리의 잔향 그리고 그의 따뜻한 손. 모든 게 천천히 사라지는데 이 하루만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 순간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그 옆에서 숨 대신 사랑을 들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