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 극단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기다란 줄을 선 내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연극영화과 출신들이었고, 모두 손에 쪽대본 하나쯤은 들고 있었다. 나만 멀뚱히 두 손을 내려놓은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이름이 호명되고 무대에 덩그러니 튕겨지듯 올라섰다. “무얼 준비해오셨나요?” 조연출 선생님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전쟁에서 아기를 잃은 젊은 엄마를 연기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과 동시에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눈물로 대사를 토해냈다.
“아가, 엄마가 너를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한량인 네 아버지는 전국팔도를 떠돌며 술에 기생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었지만, 내가 너를 가지려고 개성까지 물어물어 그이를 찾아가 너를 가졌다. 열 달 내내 피를 토하면서도 너를 지키려 삼신할매, 일월성신께 날마다 빌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점지해준 넌데, 젖 한 번 못 물리고 보내다니 이게 무슨 일이니…”
어디서 그런 신들린 연기가 나왔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가 저릿해진다. 오디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분장실로 와보라는 호출이 있었다. 그게 면접이었다. 마스크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조연출이 말했다. “러블리한 얼굴이야.” 그 한마디가 합격의 신호였다. 남학생 한 명과 함께 극단에 붙었지만 세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이모가 극단을 찾아와 나를 강제로 데려가며 그 짧은 모험은 막을 내렸다. 세 달 동안 한 번의 리딩도 없었고, 매일 포스터를 붙이고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게 다였지만, 고마운 선배들 덕분에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 출렁거림이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어느 날 다시 연극이 그리워졌고, 결국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극단 <모자이크>의 막내 단원이 되었다. 그때 가장 연장자는 일흔넷이었고, 나는 서른아홉이었다. 자연스럽게 귀여움을 담당하게 되었고, 나의 첫 작품은 오영진의 <맹진사의 경사>였다. 두 번의 오디션 끝에 내가 받은 배역은 맹진사의 작은아버지 효원 역이었다. 맹진사 역은 예순넷의 회장 언니가 맡았고, 나는 그 언니의 작은아버지가 되었다. 신입이고 가장 어린 내가 꼬장꼬장한 노인 역할을 맡다니, 연출 선생님께 가서 사정했다. “다른 배역으로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했다. “가장 효원다운 배우를 캐스팅한 거예요.”
효원은 맹진사의 얄팍한 속내를 꾸짖는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노인. 어떻게 이 인물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네 달의 피나는 연습 끝에 나는 점점 맹효원이 되어갔다. 강남구민회관 강당, 640석의 무대는 조명이 비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첫 장면, 뒷짐을 지고 “에헴” 하며 등장하는 그 순간 어디선가 관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어…” 실제로 남자인 줄 알았다는 관객도 있었다. 실패는 아닌 셈이다. 공연 도중 앞줄 관객 한 명이 다리를 쩍 벌리고 난간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효원의 말투로 외쳤다. “어딜, 양반이 다리를 벌리고 연극을 관람하는고?” 애드립이었고 객석은 웃음으로 터졌다.
1시간 45분의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러 무대 뒤로 돌아가는 순간, 등줄기로 폭포수처럼 시원한 사이다가 흘러내렸다. “아, 이 폭포수를 맞으려고 그렇게 연습했구나…” 그 순간 모든 고생이 보상받았다.
하지만 내가 연극을 통해 배운 건, 모든 갈등은 쌍방이라는 진실이다. 놀부가 왜 흥부를 미워했는지, 놀부의 아내가 왜 시동생을 증오했는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면 그 마음도 이해가 된다. 이해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일. 그때에야 비로소 한 인물의, 한 생의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우리는 삶이라는 유한한 무대에 서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을 쥔 채.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 장면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이 슬픔이라면, 그 슬픔은 곧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이 무대에서 내게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고 있는가. 오늘도 묻는다. 그리고 다시, 무대 위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