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먼저 불이 붙는 순간이 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주친 눈빛은 그저 스쳐지나갔고 던진 말들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하지만 어느 날 그 평범한 장면 중 하나에 불씨가 붙었다.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고 나 또한 그 불 앞에서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칼 융은 인간 관계에 동시성이 있다고 했다. 서로 전혀 연관 없는 사건처럼 보이던 두 순간이 어느 날 정교하게 맞물려 관계의 문을 연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마주치는 순간 왜 이제야 만났지라는 감정이 올라온다. 이해할 수 없는 이끌림 논리로는 풀 수 없는 그 묘한 타이밍. 그건 이유보다 의미로 다가온다. 그 순간은 관계의 도화선이 되고 한 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모든 관계를 인과로 설명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도 실은 이전 생에서 남긴 씨앗이 이 생에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그러니 어떤 관계든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움도 사랑도 스침도 모두 이전의 어떤 선택 어떤 생각 어떤 인연의 결과다. 이렇게 우리는 불씨를 품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내 안의 오래된 화약고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보이지 않는 인연이 그날의 말과 그날의 날씨 그리고 그 사람의 그 표정과 함께 관계의 도화선을 탁 하고 그어버린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언제나 설렘의 불꽃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이 상대의 그림자에서 시작된다. 그의 상처 그의 결핍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품으려 하지 않았던 그 어둠이 내 안의 오래된 고요와 맞닿아 묘한 연민을 피워 올린다. 그 연민은 사랑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를 이해하려는 마음 곁에 있어주고 싶은 본능 혹은 내 안의 무언가를 대신 치유하려는 슬픈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그 사람이 가진 좋은 점이 나를 끌어당긴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좋은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의 외로움과 가장 정확히 맞닿은 지점이기에 사랑이라고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내 경우를 정확히 말하자면 관계의 도화선은 언제나 측은지심이었다. 그가 가진 따뜻함이나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감추려 했던 슬픔과 부끄러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결핍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를 향한 마음은 연민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처한 외로움 그가 지닌 고통 그 누구도 몰라주는 것 같은 그 무게에 내 마음이 먼저 불붙었다. 나는 사랑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곁에 있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의 조용한 떨림에서 관계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관계가 시작될 때에도 관계가 끝나던 그 순간에도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문득 그 사람을 떠올리는 시간에도 내게는 늘 정확한 재 한 줌이 남아 있었다. 그 재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항상 같은 빛깔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측은지심이었다.
사랑이 끝났다고 느낀 날에도 그 사람을 원망하던 순간에도 나는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애처로운 불씨를 부정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항상 답은 같았다. 그가 아파 보였기 때문에. 그가 혼자였기 때문에. 그가 나보다 더 상처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불은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천천히 태우며 재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끝내 그 잿빛이 싫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조용한 이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그 재를 바른다. 그 자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얼마나 나를 불태웠는지 또 얼마나 오래도록 따뜻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상처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덧칠하며 기억을 덮으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자리에 내가 남긴 잿빛 마음을 조용히 펴 바른다.
그 재는 더 이상 쓰라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타오른 자리이며 누군가를 마음 다해 바라본 증거이며 내 안에 여전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심지가 남아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또다시 사랑할 수 있다. 잿빛으로 덮인 내 마음 위에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얹는다면 그 손끝에서 다시 불이 일어나더라도 이번엔 나를 태우는 대신 함께 따뜻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만약 그 불이 또다시 꺼지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긴 자리는 언제나 나를 더 깊게 만들었고 나를 더 정직하게 살게 했으며 그 모든 불길과 재의 시간들이 결국은 나를 나답게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나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사랑할 것이다. 다시 불붙고 다시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재 한 줌을 품게 되더라도 그마저도 나의 가장 순한 마음으로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