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사색하기 알맞은 계절이다. 바람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어간다. 그렇다. 바람 한 줄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신기루 같다. 인생의 희로애락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인연이란 것도 사소한 순간의 의식이 쌓여 부른 하나의 홀로그램이다. 우리가 바라던 시간 욕망하던 시간 그 모든 것을 불러들이고 흘려보내는 이는 결국 나 자신이다.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대상은 지금 내 주위의 인연들이다. 인연은 생하고 자라며 소멸한다. 바람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불어오는 일처럼.
나는 지금 바람의 생과 소멸 앞에 서 있다. 갈대들의 거룩하고 성대한 춤을 본다. 바람. 어떻게 한 생을 살았기에 너의 장례식에 갈대들이 이렇게 거룩한 춤을 추는가. 나는 지금 바람의 장례식을 보고 있다.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 거대한 환희의 예식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낙엽의 끝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계절의 순리라 부르겠지만 내겐 그것이 곧 생의 비밀이며 회한이다.
나는 생각한다. 바람의 장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모양이다. 바람이 머물던 자리마다 생명이 움트고 바람이 떠난 자리마다 그리움이 피어난다. 인연 또한 그러하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계절이 있고, 바람이 있다. 오늘 함께 웃는 얼굴이 내일은 기억의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해도 그 흔적은 내 마음의 바람결로 남는다.
내 안에도 바람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흐른다. 그것은 내 안의 욕망이기도 하고 갈망이기도 하다. 그 바람은 때로 나를 흔들고, 때로 나를 일으킨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버텨내야 하는지를 배운다. 흔들림을 견디는 것은 뿌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나는 바람 속에서 내 믿음의 근육을 키운다.
갈대들은 오늘도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멎으면 고요해진다. 그러나 그 고요는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의 숨이다. 바람이 다시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기다릴 줄 안다. 나는 그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살아간다.
사람의 생도 그러하다. 욕망은 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의식은 그것을 감싸 안으며 형태를 만든다. 나는 나의 의식과 욕망이 엮인 실로 오늘을 짜며 살아간다. 체와 골과 혼과 영이 얽혀 하나의 인간을 이루듯 내 안의 모든 미세한 바람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다. 때로는 헝클어지고, 때로는 찢어지지만 그 또한 내 생의 무늬이다.
나는 바람의 장례식 앞에서 내 삶의 시작과 끝을 재단한다. 어디서부터 생겨나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는 무엇을 품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가. 바람이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묻음을 다시 되묻는다.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가 바람의 숨결이라면 나는 그 숨으로 무엇을 불어넣어야 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나를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 바람이 갔다가 다시 돌아오듯이. 한때 나를 감싸던 사람들, 나를 스쳐간 사랑들, 나를 흔들어준 고통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바람처럼 내게 흔적을 남긴다. 상처는 흉터가 되고, 흉터는 문양이 되고, 문양은 결국 내 존재의 증거가 된다. 나는 그 흔적들을 품고 오늘도 숨을 쉰다.
바람이 지나간 들판에 서면 나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그 바람 속엔 누군가의 웃음이 있고, 누군가의 울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숨은 결국 하나의 바람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 바람의 일부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또 하나의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삶을 스쳐 지나가겠지.
죽음은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거대한 침묵처럼, 그러나 두려움 없이.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수많은 바람의 장례식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별의 바람, 사랑의 바람, 용서의 바람, 그리고 그리움의 바람. 그 모든 장례식이 나를 더 단단히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모든 바람들에게 감사한다.
바람은 다시 불 것이다. 내가 잠든 자리에도, 내가 떠난 자리에도. 그 바람은 새로운 생명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순환한다. 바람의 죽음이 곧 나무의 숨이 되고, 나무의 숨이 다시 인간의 호흡이 된다. 우리는 모두 그 순환의 일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떠난다. 바람이 불고 멎듯 삶도 그렇게 이어진다. 나의 생 또한 그 순환 안에 있다. 나는 그 순환의 한 입자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바람을 버티는 갈대처럼 나는 오늘을 살아낸다.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휘어지되 부러지지 않으며, 다만 바람과 함께 춤추는 법을 배운다. 삶이란 어쩌면 그 춤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지나간 바람들에게. 그리고 다시 불어올 바람들에게. 나의 인사를 보낸다. 그대들이 내게 가르쳐준 모든 흔들림과 침묵의 의미를 잊지 않겠다.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바람이 되어 그 곁을 스쳐 지나가리라.
그때 나의 바람이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치며, 눈물 대신 미소를 남기기를. 그것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