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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의 민낯

요령의 홍수시대에 사라진 진리

by 마르치아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方便)은 진리를 전하기 위한 임시의 길이다. 모든 중생이 같은 눈높이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부처는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 다르게 말했다. 어떤 이에게는 연꽃 한 송이가, 또 어떤 이에게는 눈물 한 방울이, 혹은 고통의 그림자가 진리로 향하는 문이 되었다. 방편은 그런 자비의 표현이었다. 완전한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를 위해 그가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 자비의 뜻을 잃어버린 채 방편만 남았다. 진리를 향하던 길은 사라지고 요령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책방에 가보면 온통 이런 문장들이 빽빽하다. ‘말 잘하는 법’.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 ‘사랑받는 법’. ‘고요해지는 법’. ‘행복해지는 법’. 사람들은 삶을 배우려 하기보다 살아남는 법을 익힌다. 사유는 사라지고 기술이 남았다. 깊이 대신 효율을 배우고 성찰 대신 요령을 쌓는다.


요즘의 시대는 ‘~하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넘쳐난다. 모든 불안과 상처의 자리를 ‘법’으로 덮으려는 듯하다. 그러나 덜 아프게 사는 법을 익히며 정작 아픔을 이해하는 법은 잊는다. 이 시대의 방편은 자비가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진리를 마주하기 두려워 요령으로 무장하고 감정의 온도를 계산하며 공감의 기술을 익히고 진심 대신 안전한 표현법을 찾는다.


며칠 전 나도 그런 책을 한 권 읽었다. 삶의 근원을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그 속엔 근원이 없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어조는 현명했으나 영혼의 숨결이 없었다. 삶을 말하지만 뿌리가 아닌 가지치기만 반복하는 글이었다. 모든 페이지가 요령으로 이어졌고 한 문장도 내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 시대는 방편의 기술만 남기고 방편이 향해야 할 진심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방편은 본래 깨달음으로 이끄는 징검돌이다. 그 돌 위를 걷는 자의 마음이 바르면 그 길은 진리로 이어지지만 그 마음이 흔들리면 방편은 진리를 가리는 장막이 된다. 부처의 방편(方便)은 사랑에서 나왔으나 지금의 방편은 계산에서 비롯된다. 덜 다치기 위한 말. 나를 지키는 침묵. 유리한 선택. 그것은 지혜로 포장된 자기보호다. 향기처럼 보이지만 냄새로 남는다.


나 또한 그 냄새 속을 걸었다. 누군가의 상처를 덜어주겠다며 진실을 감추었고 사실은 내 마음이 다칠까 두려워 피했다. 그때의 방편은 자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방편의 민낯을 보았다.


진짜 방편은 거짓을 꾸미는 기술이 아니다. 아직 미숙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짓는 다리이다. 그 다리가 진리를 향할 때 자비가 깃들지만 안락으로 향할 때 위선이 된다. 방편의 민낯은 그 경계 위에서 드러난다. 사랑으로 포장된 두려움. 자비를 흉내 낸 계산. 그 두 얼굴이 세상을 채운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방편으로 벽을 쌓았다. 요령이 신앙이 되었고 지혜는 계산으로 오해받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만 하면 덜 아프다’는 문장에 기대어 안도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나 고통을 통과한 자리에서 피어난다. 방편은 그 고통을 견디게 하는 다리이지 고통을 피하게 하는 지름길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그 다리 위를 걷는다. 자비와 두려움 사이에서 진리와 요령 사이에서 때로는 비틀거리며 스스로를 꾸짖는다. 방편의 민낯은 언제나 내 안에서 먼저 드러난다. 그 얼굴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방편조차 필요 없는 자리. 그곳이 진리의 문턱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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