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방황
살다보니 생의 방황기가 있었다. 그 방황은 누구에게나 오는 작은 흔들림이 아니라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진동하는 거대한 균열이었다. 암이라는 친구가 내 목에 다녀간 직후 나는 처음으로 내가 붙들고 살던 생의 뿌리가 얼마나 손쉽게 뽑힐 수 있는지 절감했다. 차가운 철제 침상에 누워 복도를 지나가던 그 순간 나는 이미 생과 사의 경계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서른두 해의 울음과 애착과 욕망과 기억이 하나씩 등 뒤로 떨어져 나갔고 그때 나는 근원적인 void¹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 void¹는 허무가 아니었다. 태초 첫 숨조차 만들어지기 전의 고요처럼 빛이 생기기 전의 잉여 같은 침묵이었고 나는 그 검은 심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두 가지 감각에 동시에 짓눌렸다. 하나는 ‘나는 오늘 이 수술방을 살아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실낫 같은 어둠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나는 마침내 내가 원래 있던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라는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생을 부여잡던 손이 스르르 풀리면서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귀가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선택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내 권리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과 죽음의 문턱은 인간의 의지로 열고 닫을 수 없는 신의 성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제발 살게 해달라고 매달릴 힘조차 놓아버렸고 그렇게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깊은 평온이 나를 감쌌다. ‘내 생명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그 찰나에 깨달았다. 인간이라는 육신으로 살아온 서른두 해의 길보다 그 깨달음의 한순간이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욕망으로 버티고 살아온 모든 날들이 나를 지탱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조용한 귀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내 안의 필라멘트를 켠다. 전류가 약해질 때 유난히 밝아졌다가 그 밝음이 똑 부러질 듯 흔들리고 그 미세한 떨림 끝에서 빛과 어둠이 찰나로 만나는 순간처럼 내 영혼도 흔들렸다 멈춘다.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일 때에도 나는 그 필라멘트를 응시한다. 그 나약함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얼마나 처연한지 얼마나 쉽게 기울어지는지 그때마다 알게 된다.
어쩌면 그 나약함 때문에 나는 또 숨을 쉬고 또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품고 또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인지 모른다. 어느 날은 욕망이 너무 커서 나를 삼킬 것 같고 또 어느 날은 욕망이 너무 작아져 내가 너무 투명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void의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곳은 더 이상 공허가 아니다. 살아 있는 내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나만의 방이다. 그 방 안에서는 욕망도 서운함도 기대도 모래처럼 가라앉는다. 그때 나는 신이 주는 평화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혼란도 파괴도 단순한 포기도 아닌 ‘너는 이미 빛에서 왔다’라는 말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 때문에 나는 다시 살아간다.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아직 갈 길이 멀다. 길이 멀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내 안의 빛의 조각들이 아직 다 사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걸음은 서두르지 않고 허겁지겁하지 않고 불안에 뒤틀리지 않는다. 내 안의 void는 나를 파괴하는 검은 구멍이 아니라 나의 생을 다시 세우는 거대한 자궁 같은 것이다. 어둠은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빛으로 밀어 올리는 방식이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지만 이미 빛의 방향으로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다. 내 발끝이 그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 아직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라멘트²가 미세하게 떨릴 때 나는 아주 조용히, 나에게 남겨진 길을 비춰보게 된다. 빛과 void 사이 육신과 영혼 사이 욕망과 해탈 사이 그 좁은 틈에서 나는 나의 생을 다시 세우는 중이다. 그렇게 길은 멀지만 내가 걷는 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도이고 이미 하나의 빛이다.
각주
1. void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태초 이전의 고요, 존재가 생겨나기 직전의 어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근원적 침묵.
2. 필라멘트
존재의 빛이 켜지기 직전 혹은 꺼지기 직전
가장 민감하게 떨리며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영혼의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