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엉키는 새벽
새벽에는 항상 그립다. 밤의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방 안을 떠다니고 어제의 그림자들이 창문 틈에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부르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 되면 마음의 문지방이 낮아지고 감정의 문고리가 느슨해져서 누군가의 이름이 아주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린다. 어젯밤에 못다 적은 말들이 새벽 공기 속에서 되살아나고 한참을 망설이며 눌러 썼던 문장들이 이불 속에서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것처럼 구겨진 채 서랍 속에 박혀 있다. 나는 늘 말하려다 밀어두고 밀어두다 지워버리고 지우다 다시 쓰는 사람이라서 당신에게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새벽마다 나를 깨운다.
당신은 동쪽에서 나와 말없이 나에게 물들었다. 빛이 벽을 타고 스며오듯 소리 없이 다가왔고 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알아채기도 전에 먼저 마음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조용한 스밈이 불안했고 왜 뜨겁지 않느냐고 왜 확신을 주지 않느냐고 당신을 기어이 시험했다. 나의 성급함과 당신의 조심스러움이 부딪히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오해했고 끝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 강물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마지막 울음이었다.
사랑이란 얼마나 많은 오만과 편견으로 얼룩지는 것인가. 내 사랑은 늘 나를 시험했고 당신의 사랑은 늘 나를 기다렸고 그 부조화 속에서 우리는 제 시간에 마주보지 못했다. 어스름이 물러가고 여명이 깃드는 그 틈 사이에 사랑이란 잠시의 찬란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별이 지나쳐 갔는지 나는 알고 당신도 알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서로를 의심했고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사랑은 참 바보 같은 일이며 그 바보 같아서 더 아름답다.
밤과 아침이 겹치는 새벽은 언제나 잔혹하게 솔직해진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살아지는 사람도 새벽만 되면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슬픈 진실들이 얼굴을 내민다. 나는 당신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새벽은 늘 나에게 진실을 들려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내가 얼마나 미련하게 당신을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지.
그 찰나의 조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울였던가. 우리가 서로를 위해 보냈던 마음들이 이미 다 소진된 줄 알았는데 새벽은 다시 그 마음을 꺼내 보여준다. 그대가 없는 밤을 아무 일도 없이 지냈다는 그 짧은 안도감이 오히려 나를 더 허전하게 만들었다. 이 편안함이 어색하다는 사실이 곧 그리움의 증거였다.
새벽에는 항상 그립다. 이불을 끌어당겨 온기 속에 몸을 숨기며 그래도 시린 마음을 어쩌지 못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내 입김으로 후후 불어본다. 그럴 때 당신의 입김이 생각난다. 숨결조차 따뜻했던 그 밤이 떠오르고 그 숨결을 잃어버린 지금이 조금 서럽다.
눈물로 얼룩진 어제를 버리고 삶의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이 시간은 늘 거룩하고 늘 고통스럽고 늘 아름답다. 우리는 오늘을 버거워하면서도 묵묵히 어깨에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바라보며 희망이란 얇은 실을 손끝에 감아 쥐고 흔들리는 마음을 스스로 묶는다.
어제를 버리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실이 새벽에는 유난히 낯설다. 그러다 문득 당신 생각에 몸을 돌리면 새벽 공기가 달라지고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당신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그대 생각이 온통 방 안을 차지하고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다가도 끝내 포기한다. 그리움이란 떨쳐낼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더 깊게 스며드는 존재다.
우리는 왜 새벽처럼 서로에게 스미지 못했을까. 왜 조금만 더 기다리지 못했고 왜 조금만 더 솔직해지지 못했나. 그 질문은 답을 가지지 않은 질문이고 새벽은 그런 질문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래서 새벽에는 항상 그립다. 당신이 그립고 우리가 지나온 길들이 그립고 내가 미처 건네지 못한 말까지 그립다. 그리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끝내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벽에 깨어 당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을 다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