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끄트머리에 앉아 보았는가. 생의 어두움을 관통한 자의 희망의 엷은 빛의 끝에 앉아 보았는가. 실낱같은 담담한 미소로 삶의 암울한 나날들을 곱게 물들여 보았는가. 혹시 매일매일 덫칠되는 우리의 일상이 빛을 잃어갈 때 과연 나의 색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게 되는 뜨거운 질문들을 견뎌 본 적이 있는가. 밝음의 끝에서 어두움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어두움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이란 밝음을 문득 마주친 적 있는가. 어둠의 끝이 밝음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운 날이 있는가. 살아남은 자만이 이해한다. 그 밝음이 눈부신 구원이 아니라 아주 먼 먼 곳에서 가느다란 선 하나로 걸어오는 미미한 따스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느다란 빛에 삶을 기대어 사는 이들은 안다네. 어둡고 또 어두운 하루하루가 씨실과 날실로 서로를 꿰매며 엮일 때 그 무겁고 엉킨 결이 어느 순간 갑자기 반짝인다는 것을. 그 반짝임은 찬란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부서지고 깨졌던 순간들의 파편들이 사금파리처럼 겹겹이 쌓여 하나의 작은 빛이 된다는 사실을 인간은 그 빛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 빛은 희망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언제나 깊은 고통의 자리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두움에 갇혀 있는 날들은 때때로 영원처럼 길고 무겁다.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을 때 밤의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숨은 점점 가늘어지고 하루의 무게는 이상할 만큼 조용히 내려앉는다. 그때 인간은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어둠을 감당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버티며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잔혹하고 서늘하며 때로는 나 자신을 산산이 깨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질문 속에서 무너진 자만이 새로운 숨을 찾아낸다. 어둠은 인간을 삼키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처가 마침내 목소리를 얻을 자리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그 고독의 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한다. 그 그림자는 감추고 싶은 기억들 후회들 수치들 고집들 슬픔들 그리고 버려진 감정들이 뒤엉켜 있는 낯선 형체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 그림자를 외면하고 싶지만 어둠은 도망칠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그 그림자의 손을 붙잡게 된다. 붙잡는다는 것은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낮의 빛이 줄 수 없는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어둠을 오래 견디다 보면 인간은 문득 깨닫는다. 어둠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나를 스스로 듣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을. 낮에는 외부의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던 내 안의 가장 오래된 목소리가 밤이 되면 아주 작은 떨림으로 깨어난다는 것을. 그 목소리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희망을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이렇게 말할 뿐이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 말을 들은 날 인간은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숨이 다시 피어난다. 숨은 언제나 어둠에서 다시 태어난다.
삶이란 밝음과 어둠 사이를 오가는 길이다. 밝음만 바라보던 사람은 언젠가 빛이 사라지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러나 어둠을 알고 살아낸 사람은 밝음이 없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밝음은 목적지가 아니라 어둠이 만들어 낸 부산물이며 어둠은 사라져야 할 실패가 아니라 생이 우리에게 단단함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것을. 인간은 실패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어둠에서 비로소 생의 구조를 배운다.
우리가 버텨낸 어두움들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우리 몸에 남는다. 어떤 어둠은 눈가의 깊은 주름이 되고 어떤 어둠은 가슴의 응어리가 되고 어떤 어둠은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불안이 되고 어떤 어둠은 말할 수 없는 울음의 떨림이 된다. 그러나 그 어둠들 모두가 쌓여 우리의 빛을 만든다. 빛이란 결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에 새겨진 어둠들이 서로 기대어 서로를 지탱하며 오랫동안 축적된 후 한 줄기의 결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빛의 끄트머리에 앉아 본 사람은 안다. 그 자리는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 자리는 인간이 가장 낮아지고 가장 고독해지고 가장 솔직해지는 자리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흘린 눈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향한 마지막 인내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작은 숨은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이의 어둠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도 그 밝음 뒤에 감춰진 어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대 위에서 웃지만 무대 뒤에서는 저마다의 어둠을 짊어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애련해지고 조금 더 다정해지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어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둠을 견디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본 적이 있다. 그 말은 거창한 위로를 대신한다. 경험한 자만이 줄 수 있는 조용하고 깊은 연대다.
삶은 결국 어둠 속에서 태어난 빛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이다. 어둠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빛은 언제나 어둠과 연결되어 있고 어둠은 언제나 다음 빛을 잉태하고 있다. 그러니 어느 날 어둠이 전부라고 느껴질 때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라. 이 어둠은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어둠은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깊은 숨이다. 이 어둠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생의 구조를 짓기 위한 기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빛의 끄트머리에 앉아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