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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생으로 살아가는 무대

by 마르치아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아흔을 채우면 긴 생을 살았다고들 말한다. 그 말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앞으로 내게 남은 여생은 손바닥에 올려둔 먼지처럼 가볍고 금세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그렇게 짧은 무대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연기하고 있는 걸까. 어떤 날에는 삶이 지독하게 고되고, 어떤 날에는 내가 왜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또렷하게 뼈 속까지 스민다. 나는 왜 늘 무대 뒤쪽에서 대기하는 언더스터디 같을까. 누군가의 대사와 자리를 대신 채워 넣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고, 무대의 조명은 언제나 내 발끝에서 멀리 비껴서만 흘러갔다. 왜 나는 빛나지 못하는 걸까. 왜 내 차례는 오지 않는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만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제주에 내려온 지 석 달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지인의 저녁 초대를 받아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로 달빛이 묵묵히 걸려 있고 그 옆에 별 하나가 유난히 또렷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차를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제주 바람은 그날따라 유독 차갑고 맑았고, 별빛은 그 바람을 가르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나는 그 별에게 속삭이듯, 그러나 절박하게 묻고 있었다. “왜 나는 빛나지 못하는 걸까. 혹시 너는 아니?”

나는 삶의 물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자연에게 기댄다. 사람에게 묻지 못한 진심을 바람에게 내어 놓고, 조금 더 깊은 곳의 상처를 별에게 쏟아 놓는다.


그날도 나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은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내 마음의 문장들을 끌어안고 답을 건넸다.


“네가 모르는 진실을 알려줄게. 우리가 너희 눈에 반짝여 보이는 건 사실 일부 별들이 쉼 없이 빛을 낼 때, 다른 별들은 잠시 빛을 내지 않으며 숨을 고르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번갈아 빛나고 번갈아 쉬지. 잠시 어둡다고 해서 우리가 별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왜 너희는 빛나려는 데만 그렇게 몰두하니. 왜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거니. 애야, 네 삶을 봐. 넌 이미 별이야. 네가 잠시 어둡다고 해서 네가 별이 아닌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


그 말을 건네듯 달 옆에서 반짝이던 별 하나는 잠시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어딘가 깊고 고독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누군가의 조명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는 내 고유의 빛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인공이었고, 빛을 쉬는 시간만을 지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법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선명해졌다.


어떤 날에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을 만나고, 포옹하고, 웃고 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뒷모습을 보는 일이 그렇게 쓸쓸해지는 날이 있다. 그들이 멀어지며 남기는 공기가 너무 비어 보이고, 마치 내 삶의 빈 무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조용히 신음한다. “저 사람도 나 같을까. 저 사람도 이렇게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악물고 살아냈던 오랜 시간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이란 것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사람은 결국 서로 얼마나 비슷한 생을 살아가는지, 얼마나 비슷하게 상처받고 얼마나 비슷하게 버티며 웃는지, 그 애련함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된다는 것을.


매일 웃는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는다고 해서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위로를 충분히 받는다고 해서 마음의 허기가 완전히 메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생은 본래 허기와 쓸쓸함을 품고 흘러가는 존재라서, 그 결핍을 인정하고 안아주는 쪽이 더 깊이 살아내는 일일 때가 많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무대에 들어오는 사람들, 그 인연들을 소중히 초대하고, 나는 내 역할을 충실히 즐기다 어느 순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무대를 내려가면 된다. 내 무대에 들어온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덜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바라보아 주기도 하는 것. 그 모든 순간이 이미 빛나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짧은 무대라도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 하고,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떠나면 된다. 그 무대에 잠시 발을 디뎠던 사람들 역시, 내 삶의 장면을 함께 채워준 고마운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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