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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효과

우리가 그토록 바랬던 인연

by 마르치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 덩이의 대리석을 품고 살아간다. 그 대리석은 그 사람의 세월보다 더 오래된 침묵을 품고 있고 그 침묵 속에는 아직 이름도 갖지 못한 어떤 나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대리석의 표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조금씩 파내거나 깨뜨리거나 혹은 아주 작은 조각만을 흘려보내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변화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나’가 천천히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대리석이 처음 깎여나갈 때 드러나는 얼굴은 늘 아름답지 않다. 때로는 보기 불편하고 때로는 왜곡되고 험상궂으며 때로는 더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조각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껍데기들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다. 진짜 나는 그 안에서 오래전부터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대리석의 조각난 파편들은 사실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내가 아닌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살면서 우리는 평생 단 한 명 만날까 말까 한 인연이 있다. 내 안의 대리석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 속에 숨겨진 형체의 결까지 읽어내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이유 없이 마음이 흔들리고 갑자기 자신이 더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내 안에 갇혀 있던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이 인연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평생 대리석의 바깥만 쓰다듬으며 지나가고 어떤 이들은 우연처럼 운명처럼 살아가는 길목에서 그 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러한 인연이 단번에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뒤늦게 찾아온다. 관계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뒤 문득 거울을 보듯 내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른다. 예전엔 몰랐던 이유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그 인연이 내 안에 어떤 조각을 떨어뜨렸는지 어떤 깊이를 남겼는지 뒤늦게 아프게 확인하게 된다. 그 아픔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고통이 아니라 비에 젖은 천처럼 조용히 스며들어오는 가늘고 깊은 통증이다. 그 통증은 내가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통해 조금 더 나다워졌다는 사실에서 온다.

관계가 멀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그제야 보이는 결들이 있다. 그 사람의 말투. 그 사람의 눈빛. 그의 침묵. 오래 숨겨 놓았던 두려움.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붙어 있던 먼지 같은 상처들. 그 모든 결들을 우리는 너무 늦게 더듬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사람이 내 안에서 떨어뜨린 조각들은 상처가 아니라 빛이었다는 것을. 나를 깎아낸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아닌 것들을 벗겨낸 것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변화가 너무 두려워 쉽게 달아난다. 조금만 깎여도 아프고 조금만 드러나도 부끄럽기 때문에 얼른 마음을 닫아버린다. 사랑이 주는 변화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요구하는 정직함이 사람을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보다 지금의 내가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은 인연일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취약한 층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평소엔 보이지도 않고 때로는 본인조차 모르고 살았던 그 층이 특정한 사람 앞에서는 너무 쉽게 드러나 자신이 갑자기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초라함은 진짜 내가 아니라 가려진 내가 드디어 밖으로 나오려 할 때의 통증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리석 속에는 이미 하나의 생명이 잠들어 있고 조각가의 일은 그 생명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대리석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손바닥으로 그 표면의 미세한 온도를 느끼고 귀를 대어 돌 속의 고요한 울림을 들었다고 한다. 대리석은 말이 없지만 어느 방향으로 깎여야 하는지를 아주 얇은 신호로 알려준다고 그는 믿었다. 그의 ‘미완성 노예’ 연작을 보면 돌 속에서 인간이 반쯤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 형체는 탄생과 고통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는 인간의 형체가 돌 속에 ‘이미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조각은 창조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말했다. 대리석의 결과 균열과 단단함과 내부에 숨겨진 무늬가 조각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고 믿었기에 그는 의지를 앞세우지 않고 돌의 방향을 따라갔다. 그래서 그의 조각들은 부드럽지만 깊고 고요하지만 끓어오르며 끝까지 완성된 듯하면서도 어딘가 한 조각의 침묵을 남긴 상태로 숨을 쉰다. 조각의 본질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발견하는 일이며 우리는 살아가며 스스로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의 작품은 조용히 말해준다.

삶에서 어떤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대리석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 인연은 나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내가 더 단단해지는 방향으로. 내가 더 깊어지는 방향으로. 내가 더 오래 붙들고 있던 상처가 떨어져 나가는 방향으로.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두렵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서늘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 안에서 무엇이 깨어나려는 순간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망친다. 조각이 이루어지기 직전 대리석이 가장 크게 울리는 그 순간 어떤 이는 손을 떼어버리고 돌아선다. 그러나 돌아선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안에서 깎여나간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흔적은 오히려 남아 평생을 따라다니며 내가 어떤 사람으로 단단해졌는지를 조용히 말해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빚어내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통해 자기의 본래 얼굴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깨지고 흉해지고 어색해지고 난처한 순간들로 가득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지나고 나면 대리석 속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하나의 결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결을 알아본 사람은 어쩌면 이미 내 곁을 떠난 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떠났다고 해서 그 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결은 남아 나의 길을 비추는 조용한 등불이 된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대부분 공허가 아니다. 대부분 형태다. 이전보다 조금 더 나다운 얼굴로 세상에 서게 되는 일.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동안 누군가가 내 대리석 속 깊은 자리를 건드려주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떤 이는 평생을 살아가고 어떤 이는 그 사실 덕분에 다시 살아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인연이 돌아오는지 연락이 이어지는지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인연을 통해 드러난 나의 형태가 이제는 스스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는지다. 미켈란젤로 효과의 본질은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자기의 대리석을 스스로 다듬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 깎아줄 수 없고 누구도 대신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인연은 우리가 그 일을 해내도록 빛이 되어준다. 그 빛이 오래 머물든 잠시 스쳐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인연 이후로 더 나다워졌는가. 그것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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