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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라는 사계절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by 마르치아


제주라는 섬에 살아간 지도 벌써 10년 차가 되어간다. 하루라는 시간에도 각기 다른 날씨가 네 개나 존재하는 곳 제주,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섬이 오래 품어온 조화로움이다. 마치 사람도 여러 부류가 있듯이 그 다양한 숨결을 서로 밀어내지 않고 품어 안는 방식, 나는 10여 년을 살아가며 그 섬의 방식을 존중하고 천천히 배워간다.


어떤 이는 맑은 날씨를 사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비가 와야 제맛이라고 한다. 빛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도 있고 흐림 속에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제주가 하루 안에 네 계절을 품어내듯 사람도 제각기 다른 온도와 다른 기압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이 섬에서 배웠다.


20분만 벗어나도 정말 다른 채도와 온도 그리고 바람의 결을 느낀다. 제주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님을 이토록 서로 다른 숨들이 한 지붕 아래 고요히 공존하고 있음을 나는 살아가며 조금씩 깨달아 알아간다.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의 색조가 미묘하게 바뀌고 공기의 두께가 달라지고 길가의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각도가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계절의 속도를 알 수 있다. 그 미세한 변화들은 마치 섬이 숨 쉬는 박동처럼 느껴진다.


흐린 날씨가 싫어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노라면 또 있었던 그 흐린 날씨가 그리웁기도 하고 너무 해가 뜨거워 잠시 흐린 곳으로 이동하면 그렇게 쾌청한 날씨가 또 그립다. 햇빛을 피해 서늘함을 찾다가도 금세 그 따사로움이 생각나고 흐림을 피해 밝은 곳으로 걸어가다 보면 다시 그 그늘의 조용함이 마음을 잡아끈다. 결국 내가 원한 것은 날씨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 흔들리고 깨어나는 나의 감각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그러나 제주에 살아가는 나로써는 제주의 모든 날씨를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다. 쨍쨍한 날엔 쨍쨍한 대로 비와 바람이 부는 날에는 또 그대로의 매력이 있음이다. 날씨가 나를 흔들던 시간이 지나자 나는 오히려 그 변화무쌍함 속에서 마음의 자리를 찾았다. 흐림은 나를 가라앉게 했고 밝음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바람은 늘 나를 다시 세계 속으로 데려갔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하루 안에 모든 감정들이 들끓는 주전자처럼 들썩일 때도 있고 지하실에서 웅크리고 있는 화초처럼 축 처지는 날도 있으니 말이다.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날도 있지만 어둠이 더 편한 날도 있고 이유 없이 벅차오르는 날도 있지만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도 있다. 감정이란 날씨처럼 다루기 어렵지만 날씨처럼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모든 게 제주에서 10년을 살아온 이주민의 고유한 떼루아가 아닌가 한다. 땅이 품은 맛과 향이 포도에 스미듯 섬이 가진 기후와 계절과 빛의 결이 어느새 나의 마음결에도 내려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 이곳에 뿌리내린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이 섬의 바람과 기압과 고요가 나를 빚어낸 하나의 맛이 되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한라산을 넘어가노라면 높은 기압과 굽은 길에 귀가 먹먹하고 머리 뒤꼭지가 저릿저릿하다. 바람이 세차게 방향을 바꾸는 순간마다 몸 안의 오래된 공기들도 따라 움직이고 산허리를 휘감아 돌 때마다 심장의 박동도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 섬의 지형과 기압과 공기는 나를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들고 그 예민함이야말로 제주가 내게 새겨 넣은 또 하나의 감각임을 나는 이제서야 알겠다.


그런데 그 예민함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생자의 감각이라 나는 너무 사랑한다. 세상의 둔탁함 속에서도 아직 미세한 바람의 결을 느끼고 작은 빛의 떨림에도 마음이 반응하고 누군가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도 내 안의 어떤 것이 조용히 흔들리는 그 감각,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섬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생의 증거다. 둔해지지 않으려는 마음, 칼날처럼 예민한 나의 감각은 이 섬이 내게 준 가장 순한 선물이다.


나뭇잎이 햇볕에 반짝거리거나 아주 희미하게 거미줄에 이슬이 매달려 있다거나 혹은 바닷가 포말에 내 마음도 산산히 부서져 내릴 때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니 말이다. 바람의 속삭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고 풀잎 사이에서 나는 작은 마찰음이 문득 나를 멈춰 세운다. 나는 그 작은 조짐들만으로도 이 세상에 아직 머물 이유를 다시 배운다.


흙냄새를 맡고 바람의 결이 볼을 스치우고 갑자기 나타난 한복판의 곶자왈, 밤에는 왜 이렇게 별이 많이도 떠 있는지 나는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산다. 검은 숲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이 오래 묵은 기도를 풀어내는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고 별들은 마치 내가 잊고 살았던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불러내듯 내 위에 천천히 떠오른다.


밤이 되면 그 적막에 내 감각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나는 그것을 안정이라 부른다. 낮 동안 흩어지고 흔들리던 마음의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다시 서로를 찾아 붙고 한라산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귀를 스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자리로 돌아온다. 그 고요는 외로움이 아니라 돌아옴이고 텅 빔이 아니라 품어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섬의 밤을 깊이 사랑한다.


그래서 갑자기 밤에 별을 보러 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낮 동안 쌓인 미세한 파동들이 별빛 아래에서 조용히 가라앉고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빛들이 내 안의 숨길을 하나씩 밝혀주기 때문이다. 별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떨림을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밤을 기다리고 별을 기다리고 그 빛 아래에서 다시 나를 찾아 돌아오게 된다.


생은 어차피 나로 출발해서 나를 통과하고 나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이다. 바람도 비도 햇살도 파도도 모두 그 여정의 길목에서 나를 스쳐 갔을 뿐 결국 내가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섬의 기후가 시시각각 변하듯 마음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뒤집히지만 그 모든 계절을 지나 돌아오는 자리 역시 나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려 한다.


계절이 변하고 나를 스치우는 냄새와 그 미세함이 바뀔 때 나는 어린애처럼 설렌다. 새 계절의 첫 기척이 코끝을 스치면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공기의 온도 변화 속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깨어난다. 그러한 미세한 떨림이야말로 내가 아직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설렘 때문에 계속 살아가고 그 설렘 때문에 또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십여 년 동안 버티며 살아온 네 계절이라는 감각이 나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이 섬의 변화무쌍한 하늘과 거칠고도 따뜻한 바람이 내 안의 오래된 층들을 조금씩 깎아내고 다시 빚어냈으며 계절마다 스며드는 빛의 색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까지 바꾸어 놓았다. 이제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고 이 섬이 길러낸 또 하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나는 이 아름다운 섬에 그대를 초대하고 싶어진다. 내가 보아온 네 계절의 결을 그대도 느껴보길 바람의 방향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는 이 섬의 숨을 함께 마셔보길 그리고 이곳의 고요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대 마음 깊은 곳의 별 하나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을 마주하길 바란다.


제발 이 섬에서 제대로 숨 쉬며 살아 보길…… 그대가 스스로의 날씨를 두려워하던 시간을 벗어나 이 섬의 변화 속에서 자기만의 계절을 다시 찾기를 바라고 그 계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언젠가 이 섬의 밤을 바라보며 나처럼 조용히 속삭이기를 바란다.


살아 있음은 이렇게 미세한 감각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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