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무강이라는 말은 너무 오래 들은 덕담이라 의미가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는 어느 날 이 말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네 글자는 조금씩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만수는 오래오래의 생을 뜻하는 말이지만 무강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배우던 의미와는 달랐다. 무강의 무를 없을 무로만 이해하면 만수무강은 오래 살되 경계가 없다는 말 정도로 읽히겠지만 나는 오래된 사유 속으로 이 말을 밀어넣어 보았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 알았던 뜻보다 더 먼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무라는 글자는 원래 없음이 아니었다. 햇살이 너무 많아 눈이 부셔 형태를 지울 때 그 상태를 무라고 했다. 눈부심이 시야를 가릴 때 사물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것은 없음이 아니라 과잉의 반대편이었다. 너무 많아서 보이지 않는 충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만수무강이라는 말을 다시 외웠다. 오래 오래의 생이 경계 없이 흐르기를 바라는 말. 인간의 생이 땅의 지경에 묶이지 않고 우주의 질서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라는 말. 무강의 무 속에는 결핍의 공백이 아니라 충만의 빛이 가득 찼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생이 막히지 않고 흐르기를 바라는 더 깊은 기원이었다. 주어진 생이 분절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고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경계를 잃어버릴 만큼 넓어지기를 바라는 오래된 축복이었다.
동양철학은 이러한 무를 단순한 부정어로 보지 않았다. 동양의 사유는 분리보다 연결을 앞세웠고 형태보다 흐름을 보았다. 인간이 자연과 우주와 같은 근원에서 태어났다고 보았기에 존재란 고립된 구조물이 아니라 전체의 호흡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파동이라 했다. 그래서 무는 세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가장 깊은 원리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드러나는 상태였다. 너무 커서 보이지 않고 너무 작아서 잡히지 않는 실재의 극점이었다. 동양철학은 이 실재의 극점을 기라고 표현했고 기는 형태를 결정하는 근원적 흐름이자 모든 생명의 숨결이었다. 기의 가장 깊은 경지는 무에 닿아 있었다. 그러니 무강의 무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 글자였다. 만수무강이라는 말은 우주와 인간의 호흡이 하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오래된 기원의 언어였다. 인간의 삶이 길어지기를 넘어서 넓어지기를 바라는 말이었고 생의 규모가 지경을 넘어 우주의 흐름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깊은 기도였다.
나는 이러한 무를 다시 배우고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평생 결핍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 여겼다. 누구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고 무언가를 가지려 해도 늘 모자라고 부족했다는 느낌이 나를 따라다녔다. 내 삶에는 항상 빈 칸이 많았고 그 빈 칸은 나를 더 외롭게 했다. 나는 그 빈 칸을 결핍이라고 불렀고 결핍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스스로를 낮추었고 종종 스스로를 탓했다. 그러나 무를 배운 순간 나는 결핍이라 부른 그 빈 칸이 실은 비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었던 충만의 자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생각이 낯설었지만 곧 그것이 내 삶의 진실을 더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결핍이라고 불렀던 감정의 어둠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버려졌던 기억들 사랑이 막혔던 순간들 오해와 단절과 절망의 골짜기들 그 속을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완전히 비어 있는 공허가 아니라 너무 깊고 너무 오래되고 너무 많은 상처와 사랑과 기억과 감정의 무늬가 한꺼번에 얽혀 있어서 한눈에 볼 수 없던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의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결핍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의 과잉이라면 내 결핍이라는 감각 또한 결핍이 아니라 충만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어둠처럼 보이는 것은 빛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빛이 너무 강하여 눈을 감게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나의 결핍도 그러했다.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감당되지 않아 형태를 잃은 충만 그 깊이를 나는 결핍이라 착각해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나는 나를 조금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텅 빈 사람이 아니었고 채워지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감정의 밀도가 너무 높아 나의 눈이 다 볼 수 없을 뿐인 사람이었다. 내가 빈 것처럼 느껴졌던 자리는 사실 오래된 사랑과 상처와 기억의 무늬가 층층이 쌓여 있는 깊은 자리였고 그 깊이가 어두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 어둠이 공허의 어둠이 아니라 충만의 밀도 때문에 생긴 어둠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부터 나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나를 지나치게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오래될수록 깊어지고 깊어질수록 인간의 삶과 닮아간다. 무는 결핍의 공백이 아니라 충만의 심연이다. 무는 사라짐의 절망이 아니라 형태를 잃은 생명력의 원천이다. 무는 텅 빈 마음의 상징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세계가 한 점으로 수축되며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는 순간을 말한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 무를 실재의 중심에 두었다. 실재의 가장 깊은 자리는 인간의 언어와 감각이 다 담아낼 수 없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세계는 이름을 잃고 근원적 흐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그러니 무는 없음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충만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만수무강이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새롭게 들린다. 오래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의 생이 지경을 넘어서 흐르기를 바라는 말로. 결핍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충만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말로. 인간의 생명력이 외적인 환경과 상처와 과거의 무게에 갇히지 않고 그보다 더 깊은 흐름에서 다시 솟아오르기를 바라는 말로. 우주의 질서 속에서 다시 자신의 이름을 찾기를 바라는 말로. 만수무강은 그렇게 인간의 내면을 향한 가장 오래된 위로였다.
나는 이 말을 나 스스로에게 건넨다. 너의 생이 멈추지 않기를. 너의 깊이가 결핍이 아닌 충만으로 이해되기를. 너의 상처가 공허가 아니라 밀도의 과잉으로 이해되기를. 너의 어둠이 사라짐의 그림자가 아니라 빛의 번짐으로 이해되기를. 너의 삶이 경계를 잃고 흐르기를. 너의 존재가 우주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이어지기를. 무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듯 너의 삶도 비어 있지 않음을 잊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조용히 이 말을 되뇌인다. 만수무강. 오래오래라는 말보다 더 먼 세계로 이어지는 말. 인간 존재의 깊이를 향해 다가가는 말. 결핍과 충만의 모든 오해를 풀고 생의 지경을 다시 그리는 말. 만수무강은 내게 더 이상 덕담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을 부드럽게 안아주는 오래된 숨결이다. 나를 향한 가장 넓은 위로이자 가장 고요한 기원이다. 그리고 그 기원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안다. 만수무강은 오래 살아라가 아니라 너의 생이 끝없이 흐르라라는 말이라는 것을. 너의 존재가 경계를 잃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라는 초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