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연대기

지금 울고 있는 당신에게

by 이 경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 똑바로 눕지 못하는 밤들이 늘고 끝내 해석되지 못했던 문장들이 몸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잘했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이라는 글자 앞에서 감정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며 달려 나간다. 생각은 늘 한 박자 늦고 감정은 그보다 더 뒤처진다. 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먼저 움직이고 먼저 멈춘다. 철학이 사유의 문제로 다뤄온 많은 질문들이 실제 삶에서는 신체의 선택으로 먼저 결정된다는 사실을 나는 나이가 들수록 분명하게 느낀다.





나는 울음이 없던 아기였다고 한다. 태어날 때 한 번 울고 첫 예방주사를 맞을 때 두 번째로 울었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순하다는 말로 정리하지만 나는 오래 그 말 앞에서 멈췄다. 울음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그러다 나는 내 울음의 뿌리를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언제 울었는가보다 언제 울지 않았는가를 떠올리게 되었고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채 다른 시간표를 갖게 되는 순간들을 되짚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도 그랬다. 나는 먼저 엄마의 몸을 눕히고 피가 묻은 얼굴을 닦았으며 입가에 붙은 누릉지 같은 침자욱을 지웠다. 그 다음에야 울음이 쏟아졌다. 어쩌면 내 울음이 엄마의 마지막 작별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앞에서 잠시 멈춰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십여 분간 나는 울음을 참지 않았지만 내 감정은 정지시킬 수 있었다. 울고 있으되 휩쓸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해야 할 일들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울어야 할 일에 잘 울지 않게 되었다. 슬픔이 줄어든 것도 감정이 메말랐던 것도 아니다. 눈물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감정은 남아 있었고 눈물은 다른 시간에 찾아왔다. 나는 그것을 눈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물은 즉각적으로 배출되는 감정의 기능이 아니라 충분히 견딘 뒤에야 허락되는 결과에 가깝다고 믿게 되었다.





연극적 감수성은 언제나 아름답게 도착한다. 조명이 내려앉고 배우의 숨이 객석까지 번질 때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슬픔을 맞이한다. 고통에는 순서가 있고 눈물이 허락되는 지점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 편의 영화 앞에서 한 권의 책 앞에서 나는 여러 번 울었다. 그 울음은 진짜였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면 마음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고 조금 전의 울음은 금세 과거가 되었다. 연극적 감수성은 슬픔을 경험하게 해주되 슬픔과 함께 살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잘 다듬어진 통로를 따라 흘러가고 정해진 출구로 빠져나간다.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무대 위의 고통에는 쉽게 마음을 내어주면서 무대 밖의 고통 앞에서는 한 박자 늦게 혹은 너무 빨리 물러나고 있지는 않았는지. 설명되지 않은 슬픔과 서사가 없는 얼굴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계산했는지. 현실의 고통은 연극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음악도 없고 이해를 돕는 독백도 없다. 때로는 나의 시간과 선택과 편의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감정을 꺼내기 전에 먼저 거리를 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눈물은 멈춘다. 차가워져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요구받을 것 같아서다.

나는 그 경계에 서 있었음을 인정한다. 울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던 순간들 공감했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던 시간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를 겨냥한 비판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눈물은 언제 삶으로 이어지는가. 어떤 울음은 왜 그 자리에 머무는가.





그래서 오늘은 눈물 한 방울의 의미가 더 크게 와닿는다. 그 눈물이 어디에서 흘러왔는지보다 어디를 향해 떨어지는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흘린 눈물인지 책장을 덮으며 남긴 감정인지 아니면 내 곁의 누군가 앞에서 끝내 참아내다 고인 한 방울인지. 눈물은 많아질수록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껴질수록 무거워진다. 이제 나는 안다. 눈물 한 방울은 감정의 증명이 아니라 내가 서야 할 자리의 방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