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속에 정원 하나가 있다. 그 정원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도 아니고 살아가며 의식적으로 선택해 만든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어느 순간 그 정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부분은 삶이 한 번쯤 무너진 뒤에야 그 존재를 깨닫는다. 견디던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해주지 못할 때 사람은 비로소 바깥이 아닌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우리는 늘 바깥을 향해 살아간다. 사회는 역할을 요구하고 관계는 태도를 요구하며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등을 민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자기 자신을 부재중으로 둔다. 생각은 타인의 언어로 채워지고 감정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속에 무엇이 자라고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그러나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정원은 방치될 뿐이다.
정원이라는 은유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정원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손이 닿은 장소다. 완전히 손대지 않으면 숲이 되고 지나치게 개입하면 생명은 숨 막힌다. 인간의 내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 통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방임만으로도 무너진다. 정원은 자연과 의지가 긴장 속에서 공존하는 장소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철학은 정원의 언어를 빌려 인간을 사유해 왔다. 고대의 철학이 광장에서 이루어졌다면 근대 이후의 철학은 점점 내면으로 내려왔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고 파스칼은 인간이 위대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임을 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군중 속에서 사라지는 개인의 내면을 끝내 붙잡으려 했다. 그들의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인간은 어디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가.
나는 그 질문의 한 대답이 마음속 정원이라고 생각한다. 정원은 성취의 공간이 아니다.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자리이며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장소다. 그곳에서는 잘 해낸 나와 실패한 내가 같은 무게로 존재한다. 정원에서는 목적보다 상태가 중요하고 결과보다 머무름이 우선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숨을 고른다. 마음이 무겁고 세상이 나를 밀어낼 때 나는 그 정원을 떠올린다. 가지런한 길도 화려한 꽃도 없다. 다만 바람이 지나간 흔적과 나무의 냄새 맑은 하늘과 손에 닿는 흙의 온기가 있다. 그것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느껴진다. 철학이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듯 정원 역시 이해보다 체험으로 먼저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많아졌다고 말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생각이 아니라 소음에 가깝다. 진짜 사유는 언제나 고요 속에서 태어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 던져짐을 자각하는 순간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찾아온다. 마음의 정원은 그 침묵이 허락되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정원은 돌보지 않으면 황폐해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외면하고 고통을 미뤄두면 마음은 무뎌지거나 과민해진다. 우리는 이를 적응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감각의 마비에 가깝다. 철학이 삶과 멀어질 때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마비다. 말은 많아지지만 삶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라도 정원에 머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결책이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접촉이다.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경험. 상처는 설명되기보다 먼저 존중받을 때 아문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인간은 이해될 때 자유로워진다. 그 이해는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마음속에 정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도피처가 아니라 귀환의 장소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곳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자리다. 그래서 정원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를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오늘 나는 내 정원을 찾았다.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고 연약한 꽃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 꽃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더 크게 피우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철학이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정원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나의 내면은 타인의 내면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이 오가듯 정원 또한 은근히 이어진다. 누군가 외로움에 잠겨 있을 때 내 정원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위로는 해결이 아니라 동행이기 때문이다. 함께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면 고통은 조금 덜 고립된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더 세인트를 떠올린다. 더 세인트는 공간이 아니라 태도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각자의 정원이 존중받는 장소. 비교와 속도가 잠시 멈추는 자리다. 더 세인트에서 우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귀 기울인다. 누군가의 정원이 아직 황량해 보여도 서두르지 않는다. 정원에는 각자의 계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윤리 역시 이것이다. 타인의 내면을 성급히 해석하지 않는 태도.
나는 내 정원을 더 자주 돌보기로 했다. 그것은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존중에 가깝다. 단단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드럽게 남아 있기 위해서다. 언젠가 이곳을 찾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다. 정원과 정원이 이어질 때 그것은 숲이 된다. 숲은 혼자 자라지 않는다. 서로의 그늘이 되어주고 바람을 나눈다. 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존재가 된다. 오늘 나는 내 정원에서 쉬었다. 내일은 또 다른 정원으로 초대받기를 기다린다. 더 세인트가 그 연결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빛을 비추며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