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의 무게

by 이 경화


이웃과 콩으로 메주를 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 오해는 시작되었다. 콩을 불리고 삶고 으깨고 손바닥으로 눌러 모양을 잡는 일은 원래 숫자로 세기 어려운 일이다. 어느 집 콩이 더 단단했는지 어느 날 바람이 더 건조했는지 어느 해 햇빛이 더 성급했는지 같은 것들이 메주의 맛을 슬쩍 바꿔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금세 웃어버린다. 손끝에 남는 콩 껍질의 질감과 메주 냄새가 옷에 스며드는 것까지는 말로 나눌 수 있어도 그것을 몇 그램의 감정으로 정리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위가 끼어들었다. "아니 도대체 한 말이 몇 킬로야". 말은 가벼웠고 식탁 위에는 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기름이 철판 위에서 얇게 튀며 소리를 내고 상추는 물기를 머금은 채 접시에서 숨을 쉬고 있었고 된장의 짠내와 마늘의 매운 향이 함께 올라왔다. 누군가는 젓가락 끝으로 고기를 뒤집고 있었고 누군가는 막 따라온 술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그 질문이 공기 속에 걸리자 우리는 고기를 씹다가 아주 잠깐 멈췄다. 씹는 속도가 어색하게 느려지고 삼키는 타이밍을 서로 눈치 보는 순간이 있었다. 사랑의 작대기도 아닌 그 순간에 우리는 의미가 아니라 단위를 찾고 있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나이 많은 언니가 말했다. “어 육지는 한 말이 10킬로인데 제주는 8킬로야.” 언니의 목소리는 단정했고 그 단정함이 오히려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누가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제야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기준이 달랐다. 같은 단어를 쓰고도 각자 다른 무게를 떠올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처음 확인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정량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꺼린다. 반면에 상대에게는 매우 정량적인 대답을 원하며 살아간다. 사과를 구입하면서 “몇 개나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대개 그냥 먹을 만큼 주세요. 서너 개만 주세요. 라고 말한다. 자신의 필요를 숫자로 고정시키는 일에는 유난히 인색하면서도 타인에게는 늘 정확한 수치를 요구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느냐.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 왜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느냐고 묻는다.


자신은 무한의 의미로 남고 싶어 하면서 상대에게는 무자비하게 단위를 들이댄다. 설명할 수 없음이라는 권리는 자신에게만 남겨둔 채 타인의 마음에는 자를 대고 눈금을 긋는다.


관계를 하다 보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계산을 하게 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상대도 당연히 내가 한 만큼은 하겠지. 그렇게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준 만큼을 상대가 그 가늠대로 되돌려 주리라는 철저한 계산이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때 그 계산은 언제나 오류를 낸다.


사람도 관계도 모두 이 계산이 어긋난 지점에서 무너져 운다. 상대가 느꼈을 단위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우리에게는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오해는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을 듣지 못하는 무지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 단위를 파악하는 일은 지극히 관계와 신뢰가 쌓이는 과정 속에 천천히 부어져야 할 시멘트 반죽일지도 모른다. 계산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더 주었다는 논리 뒤에 숨어 버리고 싶은 인간의 나약함을 대변한다.


그리고 관계를 닫을 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종종 내가 더 준 사람이라는 자리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 자리는 떠나기에 가장 편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편한 자리가 얼마나 엉성하고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하는 얇은 유리벽이었는지를 알아차리는 순간은 대개 관계가 멀어진 이후다.


나이가 드니 이 관계의 파열음을 예전만큼 겁내지 않게 된다. 그 파열음이 내 삶 전체를 흔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파열음을 들었을까.


사실 파열음을 많이 들어본 사람. 그 소리의 중앙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자신이 들고 있던 저울과 계산법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의 법칙 중에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얻으면 그만큼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도 않는 규칙. 우리는 이 법칙을 돈과 노동과 계약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만큼은 이 법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사랑은 셈해지지 않기를 마음은 흘러가기를 주고받음에는 장부가 없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하지만 관계는 늘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 말로 하지 않아도 표를 만들지 않아도 마음 어딘가에는 조용한 저울이 하나 놓인다. 오늘은 내가 조금 더 기울었고 내일은 네가 조금 더 버텼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은 채 기억한다. 그 기억은 때로는 온기가 되고 때로는 무게가 된다.


더 준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반면 더 받은 사람도 어디가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들고 있던 컵의 크기가 달랐을 뿐이다. 누군가는 넘칠 때까지 따라야 사랑이라 믿었고 누군가는 흘러내리지 않는 만큼만 담는 것이 관계라 여겼다.


그래서 어느 날 아무도 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균열은 생긴다. 등가를 맞추지 못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등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울고 잠시 멈추고 파열음을 듣는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아마 관계란 등가를 맞추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의 단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저울을 내려놓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사람은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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