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無에 대하여

by 이 경화




나는 한동안 결핍의 상태로 갈증의 상태로 살고 있는 나를 우연히 느꼈다. 의식해서 들여다본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충분히 살고 있음에도 늘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감각이 생활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너무 어릴 적부터 알아버린 이별에 대한 감각 때문이었을까. 결핍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합리화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꼭 사람이 원인이었다.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내 말이 오해라는 사실로 점철되었을 때였다. 그때의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럴 때 부모님이 계셨다면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안아 주셨을 텐데 이럴 때 형제라도 있었다면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었을 텐데 그런 장면이 습관처럼 떠올랐다.




그런 결핍으로 오십 년을 넘게 살아보니 나는 이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골목에서 놀다가 이모와 엄마가 나를 찾으러 오던 저녁이었다. 퇴근을 하던 친구들의 아빠가 친구들을 하나씩 데려가고 어떤 아이는 번쩍 무등을 타고 또 어떤 아이는 아빠가 손을 꼭 잡아준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말았다.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골목의 질서와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이모와 엄마는 마지막으로 왔고 나는 나머지 한 친구가 아빠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사라지던 그 시각과 이모와 엄마가 나타난 시각이 겹쳐지던 순간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가 그렇게 서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참다 터져버린 울음에 이모와 엄마는 당황했고 나를 안으며 왜 우느냐고 어디가 아프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태어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했다. 아프지 않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아빠가 없는 게 그렇게 억울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슬픔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다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너무 이르게 나에게 도착했을 뿐이었다.




나에게 없을 무라는 출발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자리에서. 그래서 나에게 없을 무는 어쩌면 새 옷을 사면 등 뒤에 붙어 있는 일종의 가격표 같았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떼어내지 않으면 계속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늘 그 숫자를 먼저 느끼며 살아왔다. 살면서 그 없을 무의 장면은 너무도 많았지만 나는 일찍부터 알았다. 나에게 앞으로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많으리라는 사실을. 부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손은 끝내 잡히지 않을 것이며 어떤 말은 평생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그래서 나는 놀라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기대하지 않으면 덜 아프다는 계산과 미리 마음을 낮추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방식을 택했다. 없을 무는 그렇게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없을 무의 어원을 공부하고 책을 읽다가 공사상에 대한 부분을 접했을 때 그때 알게 된 환희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 한다. 없을 무는 너무 밝아서 눈을 뜰 수 없는 환희의 상태라고 했다.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가 어떻게 밝을 수 있는지 없음이 어떻게 환희가 될 수 있는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그 빛을 여러 번 스쳐 지나왔던 것 같았다. 너무 강해서 바라볼 수 없었던 순간들 슬픔으로만 인식했기에 환희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장면들.




어쩌면 없을 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 차라리 눈을 감게 만드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잃은 것과 지나간 것과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같은 자리에서 빛나버리는 상태. 그래서 나는 이제야 알겠다. 그 골목에서의 저녁도 말하지 못한 울음도 설명 대신 선택했던 침묵도 모두 너무 이르게 도착한 빛 앞에서 눈을 감고 서 있었던 시간이었음을. 환희는 기쁨이 넘쳐서 웃는 일이 아니라 마침내 이해해버려서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지는 상태에 가깝고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게 된다. 나는 아직도 그 빛을 오래 바라보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안다. 눈을 감게 만들던 그 밝음이 내 삶을 지워온 것이 아니라 조용히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