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익숙한 길로 걸어 나가는 하루. 달력이 넘어가도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그러나 조금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삶은 결코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그러나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나는 그 변화를 나아짐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장이나 성공 같은 단어가 아니라 나아짐. 이 단어에는 과시도 없고 도착도 없다. 그저 어제보다 오늘이 아주 조금 덜 아프고 덜 급하고 덜 날카롭다는 정도의 의미만 담겨 있다. 하지만 삶은 바로 그 정도의 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흔히 변화를 이야기할 때 극적인 장면을 떠올린다. 어떤 결단 어떤 성취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사건 같은 것들. 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런 장면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진짜 변화는 바로 그 무색무취의 날들 속에서 조용히 진행된다.
예전 같으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뒤집혔을 텐데 오늘은 잠시 숨을 고르고 넘긴 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자신을 책망하던 대신 오늘은 그만큼 버틴 나를 먼저 인정해준 날. 누군가의 호의 앞에서 의심보다 고마움이 먼저 떠오른 날.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성취도 아니고 기록으로 남기기도 애매한 변화들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야말로 나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간다.
한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혹했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 왜 남들만큼 해내지 못하는지 왜 늘 한 발 늦는지 그런 질문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던졌다. 질문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자책에 가까웠다. 나는 나를 격려하기보다는 재판하듯 심문했고 위로하기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렇게 나를 다그치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늘 부족한 부분만 확대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아주 사소한 깨달음에서였다. 어느 날 문득 그래도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포기했을 상황에서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났고 실망했지만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해주었을 때 마음 어딘가에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바꾸기 시작했다.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을 먼저 찾던 시선에서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건너온 나를 먼저 보는 시선으로. 여전히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완전히 같지 않다는 것을 비난 없이 인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아진다는 것은 완벽해진다는 것과 다르다. 완벽함은 언제나 나를 현재에서 밀어냈다. 더 나은 내가 될 때까지 지금의 나는 유예되어야 한다고 아직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개념이었다. 반면 나아짐은 지금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부족한 상태 그대로를 인정한 채 아주 조금 앞으로 가는 것. 그것은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감사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감사는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건네는 감사였다. 오늘 하루를 버틴 나에게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나에게 여전히 여기 서 있는 나에게 보내는 인사 같은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감사는 다음 날을 살아갈 힘이 되었다. 억지로 끌어올리는 의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발걸음처럼.
삶은 결코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인생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리며 현재를 유보하지만 실제로 인생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삶은 매일의 사소한 선택과 반응 속에서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마치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세상이 갑자기 하얘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없이 많은 눈송이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인 것처럼.
하루의 변화는 너무 작아서 쉽게 잊힌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몇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같은 상황에서도 덜 흔들리고 같은 질문 앞에서도 조금 더 여유를 가진다. 그 차이는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 아마 내일의 나도 그럴 것이다.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나는 이제 믿는다. 삶은 어차피 과정이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나를 완전히 잃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결국 매일 나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반복 속에서 삶은 조용히 형태를 바꾼다. 언젠가 뒤돌아보면 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알 것이다. 그 자리는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곳이 아니라 아주 오래도록 하루하루를 살아낸 끝에 닿은 자리라는 것을.
오늘도 나는 나아진다. 아주 조금.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